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发表于 2017-9-19 15: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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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구보 서문은 족보로서의 형식을 갖추어 처음 간행된 것이지만, 대동보로서의 성격이 아니라 근린(近隣)의 몇몇 종친들만 족보 간행에 관여한 관계로 다소 세계(世系)에 차이를 보인다. 즉, 시조(始祖)를 6세조인 평장사(平章事) 諱宗海공으로 한 점과 지씨의 모든 후손을 의재(毅齋)공 諱 湧奇공의 자손으로 본 점이 그러하다. 또한 이 구보 서문의 원문에는 有容공의 계자(季子) 諱 臺의 계보가 빠져 있으나, 이후 족보 간행시 世系를 밝혀 원본에 삽입한 듯 하다. 참고로, 원문에 (○)를 삽입한 것은 문맥이 맞지 않아 확실히 잘못된 것을 제가 수정한 것이고, 또 (?)로 표시한 것은 확신하지 못하여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
우리 지씨의 대서(代序)가 참으로 유원(悠遠)하다. 비조(鼻祖; 시조) 평장사(平章事) 휘(諱; 죽은 사람의 이름) 종해(宗海)께서 중조(中朝)로부터 나오시어 충주에 취거(娶居)하시니, 충주 지씨가 모두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나의 구세조 휘(諱) 복룡(福龍)께서 충혜왕을 보좌하시어 판호조사가 되시고, 팔세조 휘(諱) 용기(湧奇)께서 공민·공양왕때 역상(歷相; 임금 대대로 재상)하시어 정책(定策)한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시고, 칠세조 휘 유용(有容)께서 조선에 벼슬하시어 충청 안무사, 종성 절제사를 두루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계) 판의주 목사에 이르시고, 네 아들을 낳으시니 장자는 휘(諱) 개(開) 직장(直長)이시며, 둘째는 휘(諱) 호(浩) 소윤(少尹)이시며, 셋째는 휘(諱) 명(溟) 현령(縣令)이시며, 막내는 휘(諱) 대(臺) 부사(府使)이시다. 지금의 자손된 자는 실로 이 네 분으로부터 분파되었으니 평장사의 후예(後裔) 아닌자가 없도다.
대개 선세(先世)로부터 일찍이 보첩(譜牒)이 있었으나, 중도에 병선(兵昛; 전쟁)을 겪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족보를 강론하지 못한 지가 또한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 어찌 오종(吾宗)의 흠사(欠事)가 아니리요? 내가 어릴때부터 이에 약간 뜻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일찍이 홀로 된 터라 승훈(承訓)을 받지 못하여 그 족계(族系)에 상세하지 못한 것이 있어 항상 스스로 개탄할 뿐이었다. 성장하여 공주에 살면서 전(前) 교관(敎官)인 達海(달해)가 바로 우리의 종장(宗丈)으로, 시(詩)로서 세상에 저명함을 듣고는 늘상 찾아가 뵙고 싶었었다. 그리하여 달려가 찾아뵙고는 세계(世系)를 서로 강론하여 자못 알게되었다. 이때에 신상공(申相公) 식(湜)이 순찰사로서 공산(公山)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실은 지씨의 외손인지라 또한 지씨의 세계(世系)를 찬술(撰述)하여서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드디어 그것을 기록하고 또한 동사(東史)와 제서(諸書)를 열람하여 선조의 사적을 염출(拈出; 색출)하고, 내외(內外) 제손(諸孫)의 보고 들은 것을 따라 기록하여, 십여년이 되어서야 족보가 비로소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무릇 외손된 자들은 매우 많고 또한 현달하나, 우리 종족(宗族)은 현존하는 자가 많지 않고, 또한 능히 성립(成立)한 자가 있지 아니하니, 생각컨대 하늘이 우리 종문(宗門)을 이제 막아버려 그 불능(不能)함을 더하도록 함이신가? 그렇지 않다. 우리 선조들께서 몸소 힘써 후손을 도와주고 적선(積善)하며 유경(流慶)한 일들이 어찌 정녕 이와같이 끝나고 말겠는가?
오호라! 후손들이 비록 친하고 소원함이 있기는 하나, 나의 선조로부터 보면 그 시초는 한 몸이로다. 무릇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반드시 손가락으로 서로 가리켜 보며 이르기를, "모(某)는 내 선조의 몇 대의 종손(宗孫)이요, 모(某)는 내 선조의 몇 대의 외손이다"라고 하면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자연히 감발(感發)할 것이니, 어찌 서로를 볼 때 노인(路人)처럼 여기는 일이 다시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족보를 만드는 이유인 것이다.
아! 나의 선고(先考: 죽은 아버지)로부터 나의 고조(高祖)까지는 그 행장과 배위(配位)가 모두 그 칸에 부기(附記)되어 있으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 적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이 족보를 만들기 때문에 나의 계보를 상세히 써놓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교관(敎官)께서 나를 누(陋)하다 않으시고 족보 만드는 일을 위촉하셨고, 내가 이미 사양할 수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서(序)하노라.
천계 원년(서기 1622년) 신유년 4월 하순에 후손 덕해가 序하다.
내가 이 서문을 삼가 살펴보건대, 평장사 공을 비조(鼻祖)로 함은 아마도 임진란 후에 보첩이 존재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그후에 우리 집과 각 파 동종(同宗)의 사보(私譜)가 모두 증거가 되어 사적을 밝힘으로써 선의(宣懿)공을 비조로 전수(傳守)함이 오래되었고, 또한 이미 옛 사적을 새로 얻은 즉, 변경함이 이치에 합당하여 통지하는 고로, 족보 체제의 전후(前後)가 부동(不同)한 까닭을 적으니 보는 자는 상지(詳知)하라.
후손 덕유는 삼가 쓰다.
忠州池氏先蹟
中朝
我池本自中國來故,其見(현)於歷史紀籍者,采錄于篇首῁
(우리 지씨가 본래 중국으로부터 온 까닭에, 그 역사와 기적에 나타난 것을 책머리에 채록하여 둔다)
統譜曰,池望出西河,以居爲氏῁
(통보에 이르기를, 지(池)는 멀리 서하에서 나왔고,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韻書曰,林郭園池,以居爲氏῁風俗通曰,蓋姓有九,或氏于號,或氏于諡,或氏于爵,或氏于國,或氏于官,或氏于字,或氏于居,或氏于事,或氏于職,以號唐禹夏殷也,以諡戴武宣穆也,以爵王公候伯也,以國曺魯宋衛也,以]官司馬司徒司空司城也,以字伯仲叔季,以居城國園池也,以事巫卜陶丘也,以職三島五鹿靑牛白馬也.
(운서에 이르기를, 임씨, 곽씨, 원씨, 지씨는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 풍속통에 이르기를 대개 성씨는 아홉종류가 있는데, 어떤 성씨는 號에서 그 성을 취하고, 어떤 성씨는 諡에서, 어떤 성씨는 爵位에서, 어떤 성씨는 國名에서, 어떤 성씨는 벼슬이름에서, 어떤 성씨는 字에서, 어떤 성씨는 거주지에서, 어떤 성씨는 하는 일에서, 어떤 성씨는 職業에서 성을 취했다. 號로서 취한 성씨는 당, 우, 하, 은씨이고, 諡로서는 대, 무, 선, 목씨이고, 爵位로서는 왕, 공, 후, 백씨이고 나라로서는 조, 노, 송, 위씨이고, 벼슬이름으로서는 사마, 사도, 사공, 사성씨이고, 字로서는 백, 중, 숙, 계씨이고, 거주지로서는 성, 국, 원, 지씨이고, 하는 일로서는 무, 복, 도, 구씨이고, 직업으로서는 삼도, 오록, 청우, 백마씨이다)
燮理於秦,占魁於[宋] 本註,池子華爲秦相,池夢鯉爲宋咸淳特科壯元.
(秦나라에서 섭리하고(燮理: 고르게 다스림), 宋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점하다. - 본주는 지자화가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고, 지몽리는 송나라 함순(;年號)간에 특과 장원하였음을 말한다)
中牟賢令,長溪名儒 本註,漢池瑗爲中牟令,有賢名,宋池光庭,端平進士,文學馳名,長溪人
(중모지방에 어진 수령, 장계지방의 이름난 선비. - 본주는 다음을 말한다. 즉, 한나라때 지원이 중모령이 되어, 어진 명성이 있었고, 송나라때 지광정이 단평(;年號)간에 진사가 되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장계사람이다.)
後漢蔡邕陳留東昏庫上里社碑曰惟斯庫上里曰東昏縣者衛地古陽武之戶涨鄕也秦時池子華爲丞相漢興陳平由此爲社下宰遂相高祖克平天下爲右丞相孝平之世虞延爲太尉熹平中延曾孫放爲尙書令宰相繼踵咸出里乃斯社所相乃樹碑作頌 見(현)淵鑑類函(연감유현에 나온다)
(후한 때, 채옹진이 동혼 고상리에 사비(社碑)를 두면서 말했다. 오직 이 고상리만을 동혼현이라 한 것은 위나라 땅으로 옛적 양무가 살던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진나라 때에는 (이곳 출신의) 지자화가 승상이 되고,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는 진평이 이곳에서 유래하여 사하재가 되어 마침내 한(漢)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능히 평정하여 우승상이 되고, 효평간에는 우연(虞延)이 태위가 되고, 희평중에는 연(延)의 증손 방(放)이 상서령이 되니, 재상이 끊이지 않고 이어서 모두 이 마을에서 나오니 이는 곧 이 社가 도운 것이요, 그리하여 비석을 세워 이를 기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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