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楼主: 池三

[朝韩] 忠州池氏譜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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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7-9-19 15:21:00 | 显示全部楼层

十七世  高麗忠肅王병庚午生(AD 1330)
湧奇 (용기)

號毅齋῁碧上三韓三重大匡,判三司事,判戶曹事,門下平章事,錄忠義君Ҷ忠原府院 君῁恭愍祖屢除三司事῁禑昌之祭,從太祖與鄭夢周等,策立恭讓王,擢門下贊成事, 賜中興功臣號,錄忠義君῁二年庚午,彛初獄起,流于三陟,尋許外方從便遂居沔川, 卒于壬申四月῁詳見(현)文獻誌῁
配永嘉郡夫人利川徐氏῁父承旨泗,祖執義漪,曾祖禮賓尹瓚,外祖判書礪山宋自淵῁墓 唐津合德石隅里粉土洞Ҷ子坐合捽῁○壬丙之亂失傳,而正廟庚申後孫海鎭得誌石,改封 築,具石儀,置祭田῁謹按甲午譜及己酉譜,則公流于三陟,移于沔川,太祖革正之際以 下,棘圍甚嚴,遂不食十三日而卒῁以上事實與國史相違故,姑略之不記,而以俟後人 辨正矣῁

*彛初의 獄 : 고려말 이성계의 세력이 커지자, 명나라 사신으로 있던 尹彛와 李初가 명 황제에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어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 당시 사 신으로 명나에 머물러 있던 순안군(順安君) 방(昉),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조반(趙懈)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께 알렸으므로 공양왕 2년 (1390년) 옥사 가 크게 일어 났으니 이를 彛初의 獄이라 한다.
*流 : 유배(流配)되었다는 뜻.
*遂 : 마침내.
*尋 : 얼마 있다가
*棘圍 : 가시로 둘레를 친다는 말로, 여기서는 역성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시(감금?)한다는 의미인 듯 하다.
*姑 : 우선


    호는 의재, 벼슬은 벽상삼한삼중대광, 판삼사사, 판호조사, 문하평장사, 충의군, 충원부원군에 올랐다. 공민조에 삼사사를 여러번 제수하였다. 우왕, 창왕 때에는 태조와 정몽주 등을 따라 공양왕을 책립하여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의 호를 받고, 충의군에 올랐다. 공양왕 2년 경오년에, 이초의 옥이 일어나자 삼척에 유배되었고, 얼마 안 있어 외방에서 편리를 따르도록 허락되어 마침내 면천에서 거처하다가 임신년 4월에 졸하였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배(配)는 영가군부인 이천 서씨, 부(父)는 승지벼슬의 이름은 욱, 조(祖)는 집의벼슬의 이름은 인, 증조(曾祖)는 예빈벼슬의 이름은 윤찬, 외조(外祖)는 여산 송씨의 이름은 자연이다. 묘는 당진군 합덕면 석우리 분토동에 소재하고 좌향은 자(子)방향, 합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묘를 실전하였으나, 정조 경신년에 후손 덕진이 지석을 찾아내고, 봉축을 고치고, 석의를 갖추고, 제전을 두었다. [*묘는 현존한다*] 갑오보와 을유보를 삼가 살펴 보건대, 공이 삼척에 유배된 후, 면천으로 이주하였는데, 태조의 혁정의 시절이래로 극위가 매우 심하여 마침내 13일간 단식하다가 졸하였다고 하는데, 이상의 사실은 국사와 상위한 고로, 우선은 생략하고 기록하지는 않으니, 이것으로써 후인이 바로 밝혀주기를 기다리노라.

#. ?∼1392(공양왕 4). 고려의 대신(大臣). 공민왕 때에 삼사우윤에 이르고, 우왕 때에 예의판서에 전보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여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나 1381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어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패퇴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양광·전라·경상도 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어 원수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반남현(潘南縣)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4년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를 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 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하였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으나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의 당인(黨人)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아 삼척에 유배되었다. 당시의 대사헌 김사형(金士衡) 등이 그의 죄를 덜어 공신과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으나 낭사(郎舍) 진의귀(陳義貴)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籍沒)하였다. 1391년 처(妻)의 재종(再從) 왕익부(王益富)가 충선왕의 증손이 된다고 자칭하는 것을 정양군(定陽君) 우(瑀)가 알고서 용기가 왕씨의 후예를 숨겨두었다가 후에 모반하여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이라하여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벽지에 감금하였으나, 뒤에 사면받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불우한 최후를 맞기는 하였으나, 그의 행동은 전장(戰場)에서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에 비교되었으며,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 [두 사람은 唐나라 때,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명장]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以上, 高麗史池湧奇篇, 高麗史節要, 朝鮮太祖實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사교과서에 公이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왔었는데 요즘도 있는지 궁금함)

아들: 有容  
딸   :
   女,崔용
海州人,書雲觀副正῁父摠郞得全῁忠憲公有模曾孫῁世祖丙子以昭陵外祖被禍῁子崔崙,女權專花山府院君Ҷ諡景惠,誕顯德王后῁
公의 딸은 해주사람 최용에게 출가하다. 벼슬은 서운관부정이다. (최용의) 父는 벼슬은 총랑, 이름은 득전이고, (최용은) 충헌공 유엄의 증손이다. 세조 병자년에 소릉(단종의 어머니인 덕혜왕후의 능)으로 인하여 (최용의) 외조는 화를 입다. (최용의) 아들은 이름이 최륜이고, (최용의) 딸은 화산 부원군 권전에게 출가하다. 부원군의 시호는 경혜이고, 덕혜왕후를 낳았다.
毅齋公이 忠義君에 봉해졌을 때의 敎旨:
敎曰:"卿以英邁之資,雄偉之器,常懷郭李之忠實,兼關張之勇῁撫軍則有捦循之效,臨陣則有敵愾之功῁自玄陵賓天,姦猾用事,禑昌父子漎緣竊位,濁亂紀綱,傷敗彛倫,九廟震驚῁卿與侍中李成桂奮不顧身,決義定策῁以予於王氏最親,搋承正統旣墜之緖,得以復續已絶之祀,得以血食῁其視平勃之安劉漢,狄張之復李唐,爲有光焉῁嘗命有司崇爵以封祖考,立閣以圖形像῁嫡長襲忠義之號,支庶蒙永世之宥῁錫之土田兼及臧獲῁尙慮功鉅賞微,不足勸後῁今賜卿銀錠馬匹絹帛." (高麗史/列傳/池湧奇篇)
경(卿)은 영매(英邁)한 자질과 웅위(雄偉)한 기량으로 항상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과 같은 충실(忠實)을 마음속에 지니고,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을 겸하였으니, 군사(軍士)들을 위무할 때는 부순(捦循)의 효(效)가 있으며, 전진(戰陣)에 임해서는 적개(敵愾)의 공(功)이 있었다. 현릉(玄陵: 恭愍王으로 생각됨)께서 붕어하신 뒤로 간활(姦猾)한 무리들이 용사(用事)하니, 우창(禑昌) 부자(父子)가 끼어들어 왕위를 훔쳐, 기강(紀綱)을 어지럽히고, 이윤(彛倫)을 해쳤으니, 구묘(九廟)가 진경(震驚)하였다. 경(卿)은 시중(侍中) 이성계와 함께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결의(決義) 정책(定策)하여, 내가 왕씨 혈통에 가장 가깝기에, 벌써 떨어진 정통(正統)의 실마리를 잇게하였으니, 이미 끊어진 제사를 다시 잇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보면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한(漢)나라를 안정시키고, 적인걸(狄人傑)과 장간지(張柬之)가 당(唐: 두사람은 唐나라의 中興功臣임)나라를 회복했던 것과 같은 찬란함이 있다. 일찍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관작을 높여 조고(祖考)를 봉하고(:15世 諱演公은 위에서 보았듯이 門下平章事에 추층되었음), 각(閣)을 세워 그 형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그 적장(嫡長: 諱湧奇公을 가리킴)은 충의(忠義)의 호(號)를 받고(: 忠義君에 봉해진 것을 말함), 그 지서(支庶: 毅齋公의 남동생이 셋이 더 있음)는 영세(永世)의 유(宥: 조그만 죄과는 면제함)를 입게 되었으며, 토전(土田)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그 공(功)이 큰 데, 그 상(賞)이 작음을 생각하면,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기에 부족하여, 이제 경(卿)에게 은정(銀錠)과 마필(馬匹), 견백(絹帛)을 하사하노라.


十八世  高麗恭民王癸卯生(AD 1363)

有容
  李朝世宗朝,官忠淸按撫使Ҷ判義州牧῁謹按忠淸水使先生案,公以宣德辛亥到任,壬 子陞鍾城節制以去῁墓楊州渼金面加雲里加佐谷亥坐῁
配貞夫人崔氏῁父牧使允祐,外祖文貞公綾城具緯῁墓公墓階下Ҷ子坐,俱有墓碣῁


*水使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줄임말.

이조 세종조에,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충청안무사, 판의주 목사, 그리고, 충청 수사선생의 안(案)을 삼가 살펴 보건대, 公은 덕을 베풀어 신해년에 도임하였고, 임자년에 종성 절제사로 승진하여 떠났다라고 되어 있다. 묘는 양주군 미금면 가운리 가좌곡에 소재하고 좌향은 해(亥)방향이다. [*묘는 현존한다* *以下다른 조상들의 경우도 모두 묘는 현존한다]
배(配)는 정부인 최씨, 부(父)는 목사벼슬의 이름은 윤우, 외조(外祖)는 문정공 능성 구씨의 이름은 위이다. 묘는 공의 묘의 한 단(段) 아래에 있고, 좌향은 자(子)방향이다. 두 묘 모두 묘의 비석이 있다.

#. 高麗史池湧奇篇 참고하시기 바람.
#. 世宗實錄에 公에 대한 언급이 10여 차례 나오니 참고하시기 바람.
제가 세종 실록을 열람하였는데 열람할 당시 정리해두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지금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公은 위에서 언급한 벼슬 외에도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셨고, 卒하였을 때는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어 조문(弔問)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실록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선대의 휘(諱)를 가만히 상고해 볼 때, 시조(始祖) 선의(宣懿)공으로부터 20世祖까지 이름자가 한 글자, 두 글자, 한 글자, 두 글자 이런식으로 규칙성을 보인다. 이러한 규칙성이 지켜지지 않는 계통도 있지만 대체로 상당히 잘 지켜져 내려왔다. 지금과 같은 항렬자를 지켜서 작명(作名)한 것은 어느 성씨이든 조선 초기를 지나서 중기에 접어 들면서의 일로서 고려 시대에는 어느 성씨이고 항렬자를 쓰지 않았지만 충주 지씨 선세(先世)들의 휘(諱)자가 일정한 규칙을 보인다는 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에 이는 아마도 충주 지씨 선조들께서 작명시 지켜온 내력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봅니다.



#. 충주 지씨는 21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40여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단, 27세손인충성군(忠城君)의 후손은 참의공파에서 분파하여 충성군파로 나누어진다.

#. 이상으로 고려시대까지의 조상의 계보를 간략히 마치고, 조선시대 조상의 내력은 그 계보가 방대하므로, 역사적으로 이름난 몇몇 분과 백호의 지계만 시었습니다.

(上元帥,諱龍圖公의 五代孫, 二十一世)
二十一世
逢源
一諱淨,字希容,號友松亭῁世宗辛亥生,文宗庚午文科῁以特旨拜判司僕寺事῁端宗 癸酉以都承除忠淸道節制使,未赴而坐῁安平大君黨Ҷ謫靈岩,尋被禍,卽是年冬十一 月十日也῁事載三宗實錄Ҷ莊陵誌與東鶴招魂記及國朝實錄῁正朝辛亥享莊陵配食壇, 端宗後八癸酉築友松亭于安東郡臥龍面佳邱洞松亭里,以寓景慕῁丁亥春同鄕儒林因以 祖(俎?)豆之,刊行實紀一卷῁詳見(현)文獻誌῁
配貞夫人密陽朴氏῁父進士東春῁(墓?)廣州北面外槐德里῁

또 다른 휘(諱)는 정(淨, 實錄에는 바로 이 諱字로 되어 있다)이라고도 한다. 字는 희용, 號는 우송정(友松亭)이다. 세종 신해년에 나셨다. 문종때의 경오 문과에 급제하여서 임금의 특지(特旨)로 판사복시사를 제수하다. 단종 계유년에 도승지로서 충청도 절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卒하였다. 안평대군의 무리로 영암에 유배되고, 이에 화를 입으니 바로 이 때가 겨울 11월 10일이었다. 이 일은 삼종실록, 장릉지와 동학초빙기, 그리고 국조실록에 실려 있다. 정조 신해년에 장릉(莊陵: 단종의 능)에 배향하고 식단을 올렸다. 단종으로부터 8계유년에 우송정을 안동군 와룡면 가구동 송정리에 세워서 경모의 뜻을 두었다. 정해년 봄에 동향(同鄕)의 유림들이 이로 인해 제사를 지내고(祖는 俎의 誤字임), 실기(實紀) 한 권을 간행하였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배(配)는 정부인 밀양 박씨. 부(父)는 진사(進士)로 이름은 東春, (묘는?) 광주북면 외괴덕리.
#. 1444년(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 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그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을 기다리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전라도 영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그해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함께 교살되었다. (以上, 文宗實錄, 端宗實錄, 燃藜室記述.)





二十一世 李朝世宗王 己巳生(AD 1449)
允源(윤원)

潭陽府使
贈중吏曺參議


二十二世
漢生 (한생)(셋째아들),  첫째는 漢祖, )吉城縣監 贈 參判,成宗乙未生 中宗己亥卒(AD 1475-1539
                                                            둘째는 漢宗,
鏡城判官 ;  둘째와 셋째는 장자의 그늘에 밀려서, 생년월일도 기재되지 않고 있다. .                                         

二十二世(毅齋公諱湧奇第二孫少尹公諱浩第二子縣監公得禮派,縣監公의子)
達河

字巨源῁進士῁成化乙酉文科,吏曹正郞,承文校理῁
配鎭川宋氏,父允商,祖殿直傳,曾祖郎將匡度῁
配原州金氏῁父府使由敬,祖正郞連幹,曾祖判書乙辛,外祖府使順興安至善῁墓承旨公 墓下Ҷ子坐,有墓表῁謹按公以吏文精明,載於國朝榜目῁少時與梅月堂金公時習同 學,情若兄弟,見(현)梅月堂集῁詳見(현)文獻誌῁

字는 거원, 진사(進士), 성화(:중국연호)간에 을유 문과에 급제. 벼슬은 이조정랑, 승문교리.
配는 진천 송씨. 父는 윤상, 祖는 전직 벼슬의 이름은 전. 曾祖는 낭장 벼슬의 이름은 광도.
配는 원주 김씨. 父는 부사 벼슬의 이름은 유경, 祖는 정랑 벼슬의 이름은 연간, 曾祖는 판서 벼슬의 이름은 을신, 外祖는 부사 벼슬의 순흥 안씨 이름은 지선. 묘는 승지공 묘 아래로 좌향은 자(子)방향. 묘표가 있다. 삼가 보건대, 공은 이문(吏文: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정통하였다. 그리고 국조방목(國朝榜目: 과거 급제자 명단)에 실려 있다. 어릴 적에는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그 정이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매월당집에 나온다. 자세한 것은 문헌지에 나와 있다.



二十三世  
世蓮(세련)

江陵府史
贈吏曺參議

                              

二十三世 (毅齋公曾孫郭山公諱繼江長子經歷公諱允溫派, : 원문과 配位는 족보참조바람)
世涵
생부(生父)는 한보(漢輔)이고, 자(字)는 양중(養仲)이다. 중종(中宗) 갑신(甲申) 생(生)이다. 진사(進士),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옳은 행실과 도의(道義)로 조정(朝廷)에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해(丁亥)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 64살이었다. 막내 아들, 달기(達沂)가 정사종훈(靖社從勳)에 오르자 좌승지(左承旨)에 추층되었다. 묘(墓)는 선영(先塋), 왼쪽 기슭, 좌향(坐向)은 경좌(庚坐)이다. 청음(淸陰) 김(金) 문정공(文正公)이 묘문(墓文)을 찬(撰)하였으니, 이르기를, "어찌 하필(何必) 소학(小學)을 읽을 필요가 있으랴? 그저 지씨(池氏) 집안을 보면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달해(達海), 달문(達汶), 봉휘(鳳輝) 씨 등이 효성순행(孝性純行)으로 선인군자(先人君子: 別提公을 가리킴)를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공(公)이 바로 자신의 몸으로 가르친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하였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쓰다.
(經歷公派, 別提公의 子: 二十四世)
達海
자(字)는 득원(得遠)이고, 호(號)는 송정(松亭)이다. 명종(明宗) 신축(辛丑)년에 생(生)하다. 선조(宣祖) 계유(癸酉) 생원(生員)이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갑자(甲子)년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84살이었다. 묘(墓)는 공주(公州) 우정동(牛井洞) 단평(丹坪)이며,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사람들이 공(公)을 민자건(閔子騫)에 비유하였다. (閔子騫은 孔子의 弟子로 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이며, 효성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효성(孝誠)으로 인해 사림(士林)에서 글을 올린 일이 있다. 이 일은 공산읍지(公山邑誌: 公山은 지금의 公州)에 실려 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서울에서 공주(公州)로 떠나오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두 능(陵)의 수치(羞恥)가 씻기지 않았는데도 조정(朝廷)에 서는 것이 어찌 열사(烈士)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 배알(拜謁)하러 갔을 때, 중국인들이 그의 문장(文章)을 만당(晩唐)의 시(詩)에 비할만 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雷峰公의 舊譜序文에도 언급된 사실이다) 기아(箕雅)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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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楼主| 发表于 2017-9-19 15:23:04 | 显示全部楼层
二十四世
永深(영심)

永同縣監


二十四世 (經歷公派, 別提公의 子 )
達海
자(字)는 득원(得遠)이고, 호(號)는 송정(松亭)이다. 명종(明宗) 신축(辛丑)년에 생(生)하다. 선조(宣祖) 계유(癸酉) 생원(生員)이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갑자(甲子)년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84살이었다. 묘(墓)는 공주(公州) 우정동(牛井洞) 단평(丹坪)이며,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사람들이 공(公)을 민자건(閔子騫)에 비유하였다. (閔子騫은 孔子의 弟子로 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이며, 효성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효성(孝誠)으로 인해 사림(士林)에서 글을 올린 일이 있다. 이 일은 공산읍지(公山邑誌: 公山은 지금의 公州)에 실려 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서울에서 공주(公州)로 떠나오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두 능(陵)의 수치(羞恥)가 씻기지 않았는데도 조정(朝廷)에 서는 것이 어찌 열사(烈士)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 배알(拜謁)하러 갔을 때, 중국인들이 그의 문장(文章)을 만당(晩唐)의 시(詩)에 비할만 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雷峰公의 舊譜序文에도 언급된 사실이다) 기아(箕雅)에 실려있다.



二十五世
魚躍(어약)

進士軍資縣判官
贈吏曺參議
  

二十五世 (經歷公派, 松亭公의 子 )
鳳輝
자(字)는 덕이(德而)이고, 호(號)는 부촌(浮村)이다. 명종(明宗) 갑자(甲子) 생(生)이다. 선조(宣祖) 병오(丙午) 진사(進士)이고, 공릉(恭陵) 참봉(參奉)과 왕자(王子) 사부(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병자(丙子)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 73살이었다. 묘(墓)는 위와 같고,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은 일찍이 우계(牛溪) 성(成) 선생(先生)을 섬겨, 학문(學問)이 순정(淳正)하고, 효행(孝行)이 순독(淳篤)하였으니, 진사(進士) 임만형(林晩亨) 등 백여인이 함께 소(疎)를 올려 임금께 아뢰었다. 초로계(草盧季)에 실려 있다. (이하, 원문에 誤字가 있는 듯하다) 공(公)은 다만 문고(文稿)를 태(泰)하고, 감사(監司) 죽서(竹西) 이민유(李敏迪) 공(公)이 글을 썼다. 공산읍지(公山邑誌)에 나온다.


二十五世(毅齋公諱湧奇第二孫少尹公諱浩長孫德山公諱浚派,德山公의玄孫)
德海

字受吾,號雷峰῁宣祖癸未生῁受業李體素春英῁丙子生員,甲子文科,歷春坊,至 掌令῁丙子亂爲忠淸左道召募官,引兵糧勤王,聞垮成,退歸不仕῁仁祖辛巳八月十三 日卒,享年五十九῁以振武從勳贈都承旨῁文學氣節爲名勝所重,爲言官屢批稟麟῁有 文集,行于世῁墓公州今大德郡炭洞面元松林右麓艮坐῁宋尤庵時烈撰碣文,宋同春浚 吉書,李西谷正英篆῁
配贈淑夫人坡平尹氏῁父贈參判直方,祖生員祥雲,曾祖僉樞枰大司憲慱五世孫,外祖河 東鄭好智῁己丑生丙寅卒,育二男四女῁墓捽右῁
配淑夫人星山李氏῁父埦,祖應進,曾祖讓安成公堅基后,外祖郡守平山申茂῁庚戌生癸 亥卒῁育一男一女῁墓捽左῁
字는 수오, 호는 뇌봉. 인조 계미년에 나셨다. 체소 이춘영 선생께 수업하였다. 병자 생원, 갑자 문과에 급제. 벼슬은 춘방을 거쳐 장령에 이르다. 병자호란 때에 충청좌도소모관이 되어 병량(兵糧)을 모으고 근왕하였다.(勤王: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다). 화친이 성립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인조 신사년 8월 13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진무종훈으로써 도승지에 추증하다. 문학과 기절(氣節)이 매우 뛰어났으며, 언관(言官)이 되어서는 함인을[稟鱗: 무엇을 지칭하는지 제가 모르겠지만, 아래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람) 여러번 비판하였다. 문집이 있으며 세상에 간행되었다. 묘는 공주로 지금의 대덕군 탄동면 원송림 오른편 기슭에 있고 좌향은 간(艮)방향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묘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 선생이 글을 쓰고, 서곡 이정영 선생이 전서(篆書)를 하다.
配는 숙부인 추증 파평 윤씨. 父는 참판 추증 이름은 직방, 祖는 생원으로 이름은 상운, 曾祖는 첨추 벼슬의 이름은 평(枰)으로 대사헌 민(慱)의 5세손이다. 外祖는 하동 정씨 이름은 호지. 尹 부인은 기축년에 나서 병인년에 졸하다. 2남 4녀를 기르셨고, 묘는 오른편에 합장하다.
配는 숙부인 성산 이씨. 父는 이름은 구(埦)이고, 曾祖는 양안공 성견기의 후손이다. 外祖는 군수로 평산 신씨 이름은 무(茂)이다. 李 부인은 경술년에 나서 계해년에 졸하다. 1女를 기르셨다. 묘는 공의 왼편에 합장.
#. 1583(선조 16)∼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아버지는 생원(生員) 경청(景淸)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수(璲)의 딸이다. 이춘영(李春英)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생원으로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 유생들이 이에 가담하는 것으로써 벼슬을 얻으려 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후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저작(著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향리에 머물고 있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를 전주로 배위(陪衛)하며 《분조일기, 分朝日記: 분조는 국가위기시 왕조를 둘로 나눠 그 계통을 유지하려는 것》 4권을 기록해 올렸다. 뒤에 전적·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예조와 병조의 좌랑, 용강현령, 예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사헌부정언으로 있을 때인 1632년 사친추숭(私親追崇: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그의 아버지(私親)를 왕으로 추대(追崇)하려는 것)을 반대한 대사헌 박동헌(朴東憲), 집의 권도(權濤) 등이 화를 당하자 간언을 임무로 하는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 하여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혀 구원함)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그뒤 병조정랑·춘추관기주관·사예·장령·영해부사를 거쳐 1632년 정언(正言)에 거용되어 상경하던 도중 박서(朴?)의 추천으로 충청좌도소모관이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어 모병(募兵)과 모량(募糧)에 힘쓰고 이듬해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以上,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二十五世(毅齋公諱湧奇第二孫少尹公諱浩長孫德山公諱浚派,德山公의玄孫)
汝海
字受之῁宣祖辛卯生῁行寧邊通判,龍川及鐵山府使῁仁祖丙子扈駕,南漢十二月二十 九日殉節῁贈兵曹參判,翌年丁丑返葬于淸州先幐僉樞公墓左壬坐῁公志氣雄遠,有將 帥之材,屢彠邊邑有奇功῁自上給復錄用,其外孫尤庵宋文正公撰墓文,肅宗朝旌閭, 英祖丙子及純祖丙子Ҷ高宗丙子俱遣官賜祭,享淸州儉岩祠及光州秉天祠῁事載丙丁史 及尊周錄῁
配贈貞夫人高靈朴氏῁父察訪循性,祖正郞世豪,曾祖副提學處綸῁墓捽῁

字는 수지. 선조 신묘년에 나셨다. 영변통판, 용천·철산부사를 지냈다. 인조 병자년에(병자호란시) 임금의 수레를 호종(扈從: 호위)하였으며 남한산성에서 12월 29일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그 다음해 정축년에 청주에 있는 선영(先塋=先幐)으로 이장하여 첨추공묘의 왼편 임(壬)방향에 모셨다. 공의 지기(志氣)는 웅원하며 또한 장수의 재목이 있었다. 변방에 임하면서 여러번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병자호란시 순절한 다음] 주상(主上)으로부터 급복(給復: 충신, 효자 등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던 일)과 등용(쓰임)을 받았다. 公의 外孫되는 우암 송 문정公(송시열)이 묘문을 찬(撰)하였다. 숙종조에는 정려하였다.(旌閭: 충신, 효자 등을 표창하기 위해 마을에 旌門을 세움). 영조 병자년, 순조 병자년, 그리고 고종 병자년에 각각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다. 청주 검암사(儉岩祠)와 광주 병천사(秉天祠)에 배향하다. 이 일은 병정사와 존주록에 실려 있다.
配는 정부인 추증 고령 박씨. 父는 찰방 벼슬의 이름은 순성이고 祖는 정랑 벼슬의 이름은 세호, 曾祖는 부제학 벼슬의 이름은 처륜이다. 묘는 합장.


#. 1591(선조 24)∼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변통판으로 300여 군사를 이끌고 운산의 적을 기습, 패주시켰다. 이 전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용천부사가 되었으나 모함하는 자의 참소로 의주에 충군(充軍)되었다. 배소에 있을 때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의 변란에 백의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고 장연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뒤 철산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체찰사 김류(金?)의 비장(裨將)으로서 지략을 발휘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적의 포위 속에 있을 때 김류에게 출전을 간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고 어영포수(御營砲手) 200여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패보를 접한 인조는 매우 슬퍼하고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추증하고 전사자를 수습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以上,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 충북 남일면 은행리에 장군의 旌閭閣(정려각)이 있다.




二十五世(上元帥公諱龍壽玄孫學生公諱自浩長子敎授公諱承漢派)
天錫
字大受῁號壺山῁光海庚申生῁師事尤庵宋先生῁戊子進士,丙寅文科,承旨῁肅宗 己卯十二月十八日卒,享年八十二῁文學忠孝著名,事載國朝寶鑑῁純宗朝採詢忠孝學 行之蹟,特贈資憲Ҷ諡章憲,大提學金鶴鎭撰諡狀῁墓上同有碣῁
配貞夫人杆城李氏῁父進士善承,祖進士亨元,曾祖左承旨後,外祖進士淸州金得洛῁壬 戌生丁丑九月二十一日卒,墓同原有碣῁
配贈貞夫人靑海李氏῁父嗣元῁忌辰六月一日῁墓漁郞面武溪洞鞍馬峴卯坐,有表石῁

字는 대수, 호는 호산. 광해군 경신년에 나셨다. 우암 송 선생을 사사(師事)하였다. 무자 진사, 병인 문과에 급제. 벼슬은 승지. 숙종 기묘년 12월18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2세이다. 문학과 충효가 저명하여 국조보감에 이 일이 실려 있다. 순종조에 충효와 학행의 사적을 채순(採詢; 묻고 채집)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에 특증(特贈)하고, 장헌(章憲)의 시호(諡號)를 내리다. 대제학 김학진이 시상(諡狀: 시호의 내력)을 찬(撰)하였다. 묘는 父의 묘와 같은 곳이며 묘비가 있다.
配는 정부인 간성 이씨. 父는 진사(進士)로 이름은 선승, 祖는 진사로 이름은 형원, 증조는 좌승지로 이름은 인, 외조는 진사로 청주 김씨 이름은 득락이다. [配는] 임술년에 나서 정축 9월 21일에 졸하였다. 묘는 동원.
配는 정부인 청주 이씨. 父는 이름이 사원. [配의] 기신(忌辰, 忌日)은 6월 1일. 묘는 어랑면 무계동 안마현이고, 좌향은 卯방향. 표석이 있다.


二十六世
世倫(세륜)
준源殿參奉
贈戶曹判書淸與君

22세 한생으로부터 26세 헤륜에 이르기 까지 족보상에 상세가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봐서 그 시기에 별로 빛을 내지 못한듯 싶다.


毅齋公諱湧奇長孫直長公諱開長孫參議公允源第三子諱漢生第五世孫, 二十七世)
二十七世  宣祖癸巳生 (AD 1593-1638)
繼최

字彦淑,號豹谷. 宣祖癸巳生 仁祖丁丑卒(1593-1637)
仁祖甲子῁  糾義兵平适亂,策振武功臣῁ 丙寅出守 南海῁丁卯亂又立功,除義州判官,陞瑞興府使῁丙子亂,上疏自願,赴敵邀擊於瑞興 斬獲甚衆,旣而爲敵所襲,殉節於新溪鼠目村,卽仁祖丁丑正月四日也,享年四十五 事῁贈漢城判尹,封忠城君῁聞遣官致祭῁事見(현)尊周錄῁高宗辛巳命旌閭῁享光州 秉天祠῁事載勳府籍及文獻誌῁墓府院洞車子峰戌坐῁孫壻李?撰行狀,崇禎後六癸酉 改竪墓表,宜寧南奎熙撰,驪興閔丙承書,海平尹用求書前面῁有實紀一卷῁
配貞夫人礪山宋氏῁父仁慶῁生五子三女῁墓府院洞大松里Ҷ艮坐῁
配貞夫人全州李氏,父成宗大王玄孫光原正琥,祖義信副守備,曾祖伊川君壽,外祖部將 柳宜南῁生二子῁墓與公衣履之藏在於京畿道Ҷ平澤郡Ҷ振威鄕校後麓Ҷ城隍峙Ҷ酉坐合 磡῁
○仁祖朝命官禮葬,賜牌山地及田宅奴婢馬匹,有神道碑῁
公以适亂家族離散,故平亂後獨居,而或云宋夫人死於亂中,故甚恨之῁上憫其獨居, 勸之以宗室女娶之,公不得已再娶于光原正琥女而居之῁其後宋夫人與諸子全歸,故上 告于朝廷,則上曰,{旣知宋夫人死而再娶,則李夫人爲嫡室而宋夫人爲後室,可也}, 故其後修譜時以李夫人爲嫡室,故後孫常以言爭,故今己巳修譜時後孫十一世孫相和Ҷ 相權Ҷ十二世孫球夏Ҷ十三世孫在均等與夫餘門中合議畢以宋夫人孫爲嫡῁以此詳知焉῁ 歲祭日每陰十月八日奉行῁


字는 언숙, 호는 표곡. 선조 계사년에 나셨다. 인조 갑자년에 의병을 규합하여(屟는 糾의 誤字)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3等)에 책록되다. 병인년에는 남해에 나아가 지켰다. 정묘재란시에 다시 공을 세워 의주 판관에 제수되고 서흥 부사로 승진하였다. 병자호란시에 상소(上疏)하여 적진에 나아가기를 자원하였다. 서흥에서 적을 맞아 싸워 적의 목을 벤 것이 아주 많았으나 이윽고 적에게 포위되어 신계 서목촌에서 순절하였으니, 바로 이때가 인조(仁祖) 정축년 정월 4일이며, 향년 45세의 일이다. 한성 판윤에 추증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졌으며 왕께서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 일은 존주록에 나와 있다. 고종 신사년에는 旌閭(旌門을 마을 입구에 세움)하였고, 광주 병천사(秉天祠)에 배향하였다. 이 일은 훈부적과 문헌지에 실려 있다. 묘는 부원동 차자봉에 있으며, 좌향은 술(戌) 방향이다. 公의 손녀사위 李?가 행장을 찬(撰)하였고, 숭정(:중국의 연호)후 6계유년에 묘표(墓表)를 다시 세워, 의령 남씨 규희가 찬(撰)하고, 여흥 민씨 병승이 글을 쓰고 해평 윤씨 용구가 전면에 글을 썼다. 실기(實紀) 한 권이 있다.
配는 정부인 추증, 여산 송씨. 父는 이름이 인경. [송 부인은]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나으셨다. 묘는 부원동 대송리이며 묘향은 간좌(艮坐)이다.
配는 정부인 전주 이씨, 父는 성종대왕의 현손 광원정호(琥)이고, 祖는 신의부 이름은 수비이고, 증조는 이천군(伊川君) 이름은 수(壽)이고, 외조는 부장벼슬의 이름은 유의남이다. [이 부인은] 두 아들을 나으셨다. 묘는 公의 옷과 신발의 유장품과 함께 경기도 평택군 진무향교 뒷 기슭 성황치에 함께 묻었다.
인조(仁祖)조에 관리들에게 명하여 公을 예장(禮葬)하고, 산지(山地), 전택, 노비, 마필 등을 사패하였다.(賜牌: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토지나 노비 등을 하사할 때 그 소유에 관한 문서를 주는 것, 또는 그 문서를 말함)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公은 이괄의 난으로 가족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난을 평정한 후에는 홀로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자들은 송 부인이 난중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하자 매우 한탄하고 있었다. 주상(主上)이 그의 홀로 지냄을 불쌍히 여겨 그를 권면코자 종실의 딸로 그를 장가들게 하였고, 公은 부득이 광원정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같이 살게 되었다. 그후, 송 부인이 모든 자식들을 데리고 모두 집으로 돌아오자 조정에 이 일을 알리니, 주상께서 이르시길, "이미 송 부인이 죽은 줄 알고 다시 장가를 들은 것이니 이 부인이 적실이요, 송 부인은 후실이 됨이 옳도다"하였다. 그래서 그후 수보(修譜: 족보를 새로 만듦)시에 이 부인을 적실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후손들이 항상 이를 가지고서 언쟁을 벌이는 까닭에 지금 기사년 수보시에 公의 후손, 11세손 상화, 상권 12세손 구하, 13세손 재균 등이 부여 문중과 송 부인을 적실로 할 것을 합의를 끝내니, 이상의 사실을 상지(詳知)하라. 세제일은 매년 음력 10월 18일에 봉행한다.

#. 조선 중기의 충신(忠臣). 1623년(인조 1) 관서행영(關西行營)의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의병 800명을 이끌고 가서 그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이 되었다. 이듬해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그의 친구 강적(姜適)을 보내어 난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적의 목을 벤 다음 부하를 거느리고 서울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난이 일어나 왕은 남행(南幸)한 뒤였다. 그는 군사를 사현(沙峴)에 주둔시켰다가 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이수일(李守一) 등과 더불어 난군을 맞아 싸워서 적을 섬멸시켰다. 이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이 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졌다. 뒤에 서흥부사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1636년 김자점(金自點)이 원수가 되고 그 휘하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서흥검수참(劍水站)에서 맞아 싸워 수백명의 적을 베고 용전하였으나 말에서 떨어져 팔뚝이 부러졌으므로 더 싸울 수가 없었다. 부하군사를 원수에게 부속시키고 편비(?裨) 수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달리다가 신계(新溪)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칼을 빼어 자진하였다. 뒤에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다. (以上, 仁祖實錄, 鼓山集)

#.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 97의 1에 장군의 神道碑(신도비)가 있다.
#.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 97의 1에 장군의 忠臣門(충신문)이 있다.
#. 충남 부여군 초촌면 봉곡리에 장군의 旌閭閣(정려각)이 있다.
#. 충남 금산군 제원면 동곡리에 장군의 忠義閣(충의각)이 있다.
#. 여담입니다만, 제가 公의 孫子들을 헤아려 보니 무려 61명이나 되더군요. 忠城君派의 인구 수가 충주 지씨 중에서는 제일 많고, 세대수도 일부 빠른 경우 무려 46世에까지 이르고 있 습니다.


二十八 世 仁 祖任申生 -肅宗乙卯卒 (AD 1632-1699)
鏡明(경명) 계최의 7째 아들, 配 安人茂州金氏

                           1. 水漣  2. 水滴,  3. 水瀾.  4. 水鏡  5. 水賢 6. 鏡澄
  忠佐위副司正 (정7품)


二十九 世 孝宗甲午生, 肅宗乙酉卒 (AD 1654-1705)
一咸(일함) 경명의 둘째 아들이요, 配 恭人光山金氏   
         
                       첫째는 一彦 (일언, 1648-1719), 通德郞(정5품)
                  
通德郞(정5품)

  
三十世 肅宗己卯生 英祖任午卒(AD 1699-1762)
必浩(필호) 日咸의셋째 아들, 配 安東權氏

                           첫째 必河, 둘째 必洙 肅宗丙子生 ( AD1696-1729)
                           필호의 큰아버지, 一彦(일언)의 둘째 必謹(필호의 4촌)은 通政大夫(정3품)
     * 필호 할아버지는 벼슬을 한 흔적이 족보에 없고, 그 형님 필근 할아버지가
       통정대부를 지니 셨다.

三十一世  肅宗 乙卯生  甲辰卒 (AD 1735-1784)
隣海(인해)   묘는, 永川郡 德山嚴酉坐, 配 坡平尹氏

   28세 鏡明 할아버지의  31세의 자손들 중,
   (1) 29세 일언의 손자, 30세 필근의 둘째 아들 成雲(성운)  禮曺參議(정3품)
   (2) 29세 일함의 손자, 30세 필수의 아들 應海(응해) 嘉善大夫(종2품)


三十一世 (毅齋公의 14代孫, 經歷公派)
錫永 (AD 1855-1934)
字公允,號松村῁哲宗乙卯(AD 1855) 生῁癸未文科,正言,觀察使,左承旨῁甲戌(AD 1934)十二月二十 六日卒,享年八十῁墓忘憂里家族墓地῁公博於文而有啓蒙之績,精於醫而有濟衆之 功῁有文稿῁
配淑夫人驪興陳氏῁父錫圭,祖序儒,曾祖起秀,外祖全州李仁明῁忌辰七月六日῁有一 男一女῁
配淑夫人金海金氏῁父議官顯九,祖都正萬植,曾祖濟根,外祖淸州韓良烈῁
字는 공윤, 號는 송촌, 철종 을묘년에 나셨다. 계미 문과 급제. 벼슬은 정언, 관찰사, 좌승지에 이르다. 갑술 12월 26일에 졸하니 향년 80이다. 묘는 망우리 가족 묘지이다. 公은 文에 박식하여 계몽의 치적이 있으며, 의술에도 정통하여 대중을 구제한 공이 있다. 문집이 있다.
配는 숙부인 여흥 진씨. 父는 석규, 祖는 서유, 증조는 기수, 외조는 전주 이씨 이름은 인명이다. 기일은 7월 6일이다. 일남 일녀가 있다.
配는 숙부인 김해 김씨. 父는 의관 벼슬의 이름은 현구, 祖는 도정 벼슬의 이름은 만식, 증조는 제근, 외조는 청주 한씨 양열이다.

#. 서울대학 병원내에 선생의 동상이 있다.
동상(銅像)과 더불어 적힌 글:
松村 池錫永 先生은 朝鮮王朝末에 처음으로 種痘法을 보급한 近代 醫學의 開拓者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最初로 設立된 近代醫學敎育機關인 官立醫學校 初代 校長으로 이땅에 醫學敎育의 기틀을 마련한 先驅者로서 이제 後學들은 先生의 높은 業績을 기리고 敎育과 社會奉仕에 바친 先生의 崇高한 理念을 길이 傳하기 위하여 뜻있는 이들의 精誠을 모아 이 銅像을 建立한다.
#. 先生은 근대 의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국문 연구에도 공헌한 바가 크다. 1905년에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께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學部) 안에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를 설치케 하였다.




三十二世 肅宗乙酉生, 英祖丁酉八月五日卒( AD 1729 - 1777)
啓昌(계창)

通政大夫(정3품),  配 淸州韓氏
  묘는   慶州郡 杞溪面禾垈洞 甲座에 모셨다가,
  현재 우리 직계가문의 선산인 迎日郡 西面 中丹里로 이전함

      *  같은 학력의 현제중에,
         (1) 30세 必謹의 손자, 31세 成雲의 아들 海元이 訓蒙敎官(정3품)을 지녔다.
               해원의 아들(32세) 建休(33세)는 壯陵參奉 贈 戶曺參議         

(2) 30세 必謹의 손자, 31세 成玉의 아들 海達이 通政大夫(정3품)을 지님


三十二世 (毅齋公의 15代孫, 經歷公派)
靑天
字大亨,一名錫禹,號白山῁一八八八年甲子一月二十五日生,一九五七年丁酉一月十 日卒῁墓道峰區水踰洞光復公園墓地῁滿洲通化縣新興武官學校敎官,高麗革命軍官學 校校長,正義府軍事要員兼總司令官,大韓獨立軍總司令官으로雙城戰鬪및大旬子嶺戰 鬪에勝利,大韓民國上海臨時政府軍事部長,韓國光復軍總司令官,制憲國會議員,大 同靑年團長,初代無任所長官,建國功勞勳章복장,中央宗親會初代會長歷任῁
配坡平尹氏῁父基喜,墓合葬῁

字는 대형, 또다른 이름은 석우, 호는 백산. 1888년 갑자 1월 25일에 나서 1957년 정유 1월 10일에 졸하다. 묘는 도봉구 수유동 광복 공원묘지. 만주 통화현 신흥무관학교 교관, 고려 혁명군관학교 교장, 정의부 군사요원 겸 총사령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쌍성전투 및 대순자령 전투에 승리,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사부장,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제헌 국회의원, 대동청년단장, 초대 무임소장관, 건국공로훈장 복장, 중앙 종친회 초대 회장 역임. 配는 파평 윤씨. 父는 기희, 묘는 합장.

#. 천안 독립기념관 정문에 장군의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 내용: 大旬子嶺의 攻擊은 二千萬大韓人民을 爲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다. 총알 한 개 한 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英魂이 保佑하여주는 피의 使者이니 諸君은 檀君의 아들로 굳세게 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 萬代 자손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라.



三十三世   英祖丙辰生 高宗甲茂 九月十一日卒(AD 1796-1874)
基弼(기필)  配 密陽朴氏
僉知中福府事. 묘는 선산(선산이 두곳에 있음), 영일군서면사가리

           (1)  基載(33세)-成涵의 손자요, 海貞의 아들.
               肅宗丁未生  純祖任申十二月八日卒(1727-1812)
           (2) 기재의 아들 德麟이 (34세) 禮曺參議를 지님
           
*  기필 할아버지 이후부터 족보에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三十四世 英祖甲午生  正祖戊午八月二十五日卒 (AD 1774-1798)
命得(득명) 配 密陽朴氏
                    묘 서면사가리 선영


    三十五世
宅潤(35) -達源(36)-完鉉(37)-坤求(38)                           
                                           鈺求(38)-仁根(39)-正煥(40)                     
                                           錘求(38)-相根(39)-植煥(40)
                                                         經根(39)-徹煥(40)
                                                                       輝煥(40)
                                                         孝根(39)-正煥(40)

   三十五世
宅久(35)-菊源(36)-永鉉(37)-世求(38)-旭根(39)庚申(AD 1920.5.9)
                                                        順哲(39)(女)癸亥(AD 1923)
                                                        貞根(39)    戊辰(AD 1928)
                                       (1명 正德 )  景根(39)-聖煥(40)
                                                                    -吉煥(40)-------善培(41)
                                                                                               俊培(41)
                                                             -聖美(女)(40)
                                                        茂根(39)
                                                        達根(39)

三十五世 純祖任戊生 哲宗乙未四月二十八日卒(AD 1802-1859)
宅久(택구)
                        묘 西面中丹里 선산,  配密陽朴氏
              


三十六世  純祖丁亥生 高宗己丑三月六日卒 (AD1827-1889)
菊源(국원)       묘 영천 고천면 상수동, 配陽川許氏

                                                               

三十七世 高宗任申五月二十三日生 (AD 1872-1936
永鉉 (영현) (일명 永圭)  )
  配 月城金氏 父 炳重,   高宗己巳八月三十日生    (AD 1869-1942)

   할아버지 1936년에 별세하시었으나, 아버지가 안강에서 목회하실때  일제시에는 선산에 장례를 치루지 못하여 묘는 경북 안강교회 김해천(외가와 인척) 장로님 부인 산소 곁에 안치하였다가. 백호가 미국이민온 관계로 1985년 추석날, 선산 西面 中丹里에 이장하였다.
古 池永圭之 墓 라는 비석이 서 있다.
   
   할머니의 산소는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 동당리 공동묘에 모셨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을 듯 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38선이 가로막힌 탓이다.
   *  족보에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자가 기록되지 않을 것을 봐서, 이 족보는 할아버지 생존시에 편찬된 것임을 알수 있다.  백호의 3살때 돌아가신 것으로 구전되어 있다.

   백호의 할아버지 영현은 삼대독자로서, 29세에 백호의 부친을 득하셨다.   할아버지는 한학자요 한의였다.
   대대로 불교인 우리 가문이, 아버지(세구)가 예수님을 영접하자, 할아버지도 상투를 밀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경북 영일군 연일면 생지동에 소재한 연일교회를 창설하고 장로가 되셨다.
  

三十八世  光武 庚子 八月二十五日生  光復 丁亥 三月二十七日卒 (AD1900-1947)
世求 (일명 世演), 장로교 목사.  묘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태산리, 태산교회 조장로 선산.

      配 月城金氏 父浩東, 어머니 실명은 金玉今 辛丑生 戊寅卒(AD 1901-1938), 묘 함경북도
                                          配 黃愛希 (AD 1913-1995,3월3일)
                                          子  茂根 壬午四月二十四日生(1942- 2001,6.20)
                                                무근은 사후 유산 4천만원을 중국 신향에 복음센터건립에 기증했고, 시신은 순천향병원에 기증하여 후학에 이바지 하기로 했다.

                                          子  達根 癸未十月十三日生 (1943-1985, 2.19)
                                               달근이는, 숭대사학과 2학년 재학중 419혁명 대열에 참가,  부상을 입고, 월남전에 참전, 혁혁한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이도 월남전의 심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1985년 2월19일 42세의 일기로 별세하고, 현제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백호가 어렸을때,  큰 형 욱근의 이름이 족보에 기록된 것을 봤다. 이로써
  그 파보가 1920년 대 이후에 편찬된 것을 알수 있다.


三十九世  癸酉生 四月七日生 (AD 1933-   )

景根(일명 正德),    기독교 목사.

配 原州邊氏 父 鳳珏 丁丑 正月五日生(AD 1937- )

四十世

聖煥(일명 聖旭)  己亥 十二月十二日生( AD 1959-)

吉煥(일명 聖吉)  辛丑 五月六日生 (AD 1961-)
     配 原州邊氏 父 재억, 辛丑十一月十三日生 (AD 1961-)
     子  善培 俊培
聖美(여) 癸卯 八月十七日生 (AD 1963- )
    配, 태  홍   庚子 一月十九日生(AD 1960- )
         子,  태지원 戊辰 十一月四日生 (AD 1988-)   
               태지훈 庚午 七月十八日生 (AD 1990-)
               태지미 辛未 七月十二日生 (AD 1991-)

四十一世

善培  丁卯 三月三日生         (AD 1987- )
俊倍  庚午 三月二十七日生   (AD 1990-)



          ###. 충북 충주시 종민동에 충주 지씨 시조의 추모비와 6세조의 유적비를 세웠다.

###. 전남 광주에 秉天祠院(병천사원)을 충성군파의 후손, 조선조 참봉, 중추원 참의관인 池應鉉 公이 건립하시고 충신들의 영정을 모셨다.

###. 경북 안동군 와룡면 가구동 송정리에 友松亭을 세워 조선 세조 충청 절제사공 諱 逢源공을 추모하다. 그리고 매년 享祝한다.

###. 경남 의창군 내서면 신감리 1230번지에 義忠祠를 세워 고려조 및 조선조 공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매년 祭享을 奉行한다.

이상 대략을 적었으나, 미비된 것은 후세의 자손들이 보충하기를 바란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 뻣대있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이조에서 고고한 선비의 가문으로 내려왔으니, 이후 후손들이 열조의 얼을 내려받아 더욱 가문을 빛내어 가기를 이에 다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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