忠州池氏譜略

 

 

층주(忠州) 지씨(池氏) 족보(族譜)는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때에(西紀 1621년), 뇌봉공(雷峰公, 諱德海)께서 시성(始成)하시어 (제가 살펴본 바로는 본관별 성씨 순으로 31번째임), 1990년 경오보(庚午譜)까지 수 차례 수보(修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아래의 내용은 충주지씨대동보(忠州池氏大同譜, 총 10卷, 1990년 庚午譜)의 일부를 불초한 제가(1971年,大田産) 번역한 것입니다. 혹시 집에 족보가 없어서 조상의 내력을 모르시거나, 또는 족보가 있더라도 한문으로 된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신 종친들을 위하여 조상의 뿌리를 아는 데 일조할 목적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종친들께서는 이 내용을 보시고 조상의 내력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충주 지씨가 아닌 분들께서는 다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족보의 내용은 제 직계(直系)를 중심으로 한 고려 시대까지의 계보와 조선 시대에 역사적으로 이름난 분들을 외람되게도 제 임의로 수록한 것입니다. 세대(世代)를 괄호로 묶어 놓은 것은 제 직계 조상이 아님을 표시한 것입니다. 고려때까지의 제 직계가 곧 충주 지씨의 직계가 되며, 괄호로 묶은 것은 방계(傍系)에 해당합니다. 수록된 내용은 족보의 내용은 물론이고, 제가 사사롭게 알고 있는 내용들과 견해 등을 포함하였으며, 또한 족보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다른 서적에서 정리된 조상의 행적 등을 실었습니다.

이 문서는 충주지씨대동보(忠州池氏大同譜)의 내용을 기초로 하였으나, 외람되게도 제가 임의로 족보의 내용을 짜르고 붙이고, 다른 서적에서 조상의 사적(事績) 등을 끌어오기도 하고, 또는 사사로운 제 견해 등을 덧붙였으니, 이는 다만 조상의 내력에 대해 하나라도 더 자세히 알리고자 하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랄 뿐이고, 또한 오류가 없기를 바랍니다.

홈페이지 : http://www.shinbiro.com/~orinoko

전자우편 : orinoko@shinbiro.com

경오보(庚午譜) 서문(序文)에 따르면 충주 지씨는 계세(繼世: 代를 이은) 21평장사(平章事, 고려시대의 거족으로 족히 불리워질 정도임), 3功臣을 포함한 5忠節(忠義君 諱湧奇, 忠武公 諱龍壽, 忠城君 諱繼癍, 鐵山府使 諱汝海 등등) 12將軍, 103孝, 72文學, 불탐환로의(不貪宦路: 벼슬길을 탐내지 않은) 12文科(아래 도표 참조 바람), 8代 9進士(經歷公派: 8代에 걸쳐 대대로 進士를 하였음), 84司馬(生員, 進士), 31孝烈, 3大名書畵, 2大筆苑(池運永: 詩書畵 3節로 유명, 池昌翰: 詩畵에 능했음: 六堂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 조선 시대의 명필로 열거된 사람들 중 이 두 분이 끼어 있음), 그외에 독립운동가로 池霞榮, 의병장 池弘文, 池靑天 장군 등이 유명하며, 특히 광복군 총사령관, 초대 무임소 장관, 제헌(制憲)·2대 국회의원인 池靑天 장군은 충주 지씨 초대 종친 회장이기도 합니다. 이상으로 방대한 대동보의 내용을 갈음하고, 아래의 내용으로 간략하나마 조상의 내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宗訓 : 信愛團合 奉先啓後

宗親間에는 信義와 血族의 따뜻한 愛情으로 서로 도우며 團合하고,

崇祖奉先하고 자라는 後孫을 正義롭게 啓導한다.

1997年晩秋,後孫濬謹書

아래의 도표는 朝鮮文科榜目(조선문과방목)에 실린 忠州池氏 대과(大科) 급제자(及第者)들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는 12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래의 문과방목(文科榜目)에 실린 분은 모두 10분입니다. 여기서 2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제가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그 2분은 諱有容公의 長子이신 諱開公이 "登文科未昌榜而卒"이라 하여, 문과에 올랐으나, 그 증서를 받지 못하고 졸하였다하니 이 榜目에 빠져있는 듯합니다. 또 한 분은 節制使 逢源公이 文科에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文宗庚午文科) 그 분이 단종(端宗) 폐위시 연루되어 유배된 후, 유배지에서 화를 입었기 때문에 누락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다만, 제가 혼자 추측해 본 것에 불과합니다.

 

 

 

   字

   生年

前歷

官職

等位

小科

試驗年度

分派(代數)

池達河

巨源

?

進士

判校, 吏曹佐郞

丁科.18

?進士

世祖11年

乙酉春塘大榜

1465

縣監公派(22世)

池成海

仲深

乙丑,1565

生員

郡守

(丙).22

乙卯生員

1615

光海10年 增廣榜

1618

翼安君派(25世)

池德海

受吾

號雷峰

癸未,1583

生員

掌令,正言

贈都承旨

(丙).9

乙巳生員

1606

仁祖2甲子

1624

增廣榜

德山公派(25世)

池天錫

大受

號壺山

庚申,1620

參奉

禮曹佐郞

(乙).1

戊子進士

肅宗12年

丙寅.1686

別試榜

敎授公派(25世)

池 欽

敬甫

丁巳.1677

業儒

典籍

(乙).1


肅宗28年

壬午.1702

咸鏡道別試榜

敎授公派(26世)

池應龍

文瞻

號松岡

壬寅.1722

幼學

司憲府掌令

郡守

(丙).21


英祖28年

壬申.1752

庭試榜

德山公派(30世)

池德斌

元質

號默齋

丁卯.1747

幼學

正言

(丙).33


英祖50年

甲午.1774

式年榜

德山公派(31世)

池鳳翎

?

戊戌.1838

幼學

?

(丙).40


高宗26年

己丑.1889謁聖榜

?

池錫永

公允

號松村

乙卯,1855

幼學

正言,觀察使左承旨

(乙).6


高宗20年.

癸未.1883式年榜

經歷公派(31世)

池鵬鉉

?

丁巳,1857

幼學

?

(乙).7


高宗28年

辛卯.1891增廣榜

?

 

 

 

 

 

 

(?로 표시한 것은 제가 미처 확인을 못한 것입니다)



忠州池氏舊譜序


惟我池氏遠有代序῁鼻祖平章事諱宗海出自中朝,娶居忠州,忠之有(?忠州之)池氏盡自此始焉῁至麗季,我九世祖諱福龍佐忠惠王,爲判戶曹事,八世祖諱湧奇歷相恭愍Ҷ恭讓王,以定策功封忠義君,七世祖諱有容仕國祖,轉忠淸按撫使Ҷ鍾城節制使,至嘉善大夫Ҷ判義州牧,生四子,長諱開直長,次諱浩少尹,次諱溟縣令,季諱臺府使῁今之爲子孫者實自四公分派,而莫非平章事之裔也῁蓋自先世嘗有譜牒,而中經兵昛,無復存者,族譜(○)之不講亦已久矣,豈非吾宗之欠事乎?德海自少時稍有志於此,而不幸早孤無所承訓,其族系有所未詳,常自慨然而已῁及長贅于公州,聞前敎官達海卽吾宗丈,而以詩鳴于世,平日之所願拜者也῁馳往省之,相與講世系,頗悉焉῁時申相公湜以巡察使鎭公山,實池氏外孫也῁亦撰池氏世系,以示余焉,余遂錄之῁又閱東史諸書,拈出先祖之事蹟,內外諸孫隨見聞而記,積十餘年而族譜始成焉῁凡爲外孫者甚衆且顯,宗族見存者無多,亦未能有所成立者,意(○)天將大吾之門而故使之窒以益其不能歟?不然,吾先祖之所以垤躬燾後Ҷ積善流慶者,寧若是而止也耶?於戱!後屬雖有親疎,而自吾先觀之,則其初一身也῁凡觀吾譜者必指點而相示曰{某也吾先祖幾代之宗孫也,某也吾先祖幾代之外孫也},則親愛之心自然感發矣,豈復有相視如路人者哉?此吾譜之所以作也῁噫!自吾先考,以至吾之高祖,其行狀及其配某氏,皆附於其間,而他則不書者,蓋以吾作此譜而吾之所自出不敢不詳也῁敎官不以余陋,屬之以作譜,余旣不獲辭,又因以序之῁

天啓元年辛酉四月下澣 後孫德海序

德裕謹按,此序文以平章事爲鼻祖,蓋以壬辰亂後譜牒無存而然也῁其後吾家與各派同宗之私譜皆據明蹟,以宣懿公爲鼻祖傳守,久遠῁且旣新得舊蹟,則理當變而通知,故譜體之前後不同書其所以,觀者詳焉῁

後孫德裕謹識

 

위의 구보 서문은 족보로서의 형식을 갖추어 처음 간행된 것이지만, 대동보로서의 성격이 아니라 근린(近隣)의 몇몇 종친들만 족보 간행에 관여한 관계로 다소 세계(世系)에 차이를 보인다. 즉, 시조(始祖)를 6세조인 평장사(平章事) 諱宗海공으로 한 점과 지씨의 모든 후손을 의재(毅齋)공 諱 湧奇공의 자손으로 본 점이 그러하다. 또한 이 구보 서문의 원문에는 有容공의 계자(季子) 諱 臺의 계보가 빠져 있으나, 이후 족보 간행시 世系를 밝혀 원본에 삽입한 듯 하다. 참고로, 원문에 (○)를 삽입한 것은 문맥이 맞지 않아 확실히 잘못된 것을 제가 수정한 것이고, 또 (?)로 표시한 것은 확신하지 못하여 그대로 실은 것입니다.


우리 지씨의 대서(代序)가 참으로 유원(悠遠)하다. 비조(鼻祖; 시조) 평장사(平章事) 휘(諱; 죽은 사람의 이름) 종해(宗海)께서 중조(中朝)로부터 나오시어 충주에 취거(娶居)하시니, 충주 지씨가 모두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나의 구세조 휘(諱) 복룡(福龍)께서 충혜왕을 보좌하시어 판호조사가 되시고, 팔세조 휘(諱) 용기(湧奇)께서 공민·공양왕때 역상(歷相; 임금 대대로 재상)하시어 정책(定策)한 공으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지시고, 칠세조 휘 유용(有容)께서 조선에 벼슬하시어 충청 안무사, 종성 절제사를 두루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계) 판의주 목사에 이르시고, 네 아들을 낳으시니 장자는 휘(諱) 개(開) 직장(直長)이시며, 둘째는 휘(諱) 호(浩) 소윤(少尹)이시며, 셋째는 휘(諱) 명(溟) 현령(縣令)이시며, 막내는 휘(諱) 대(臺) 부사(府使)이시다. 지금의 자손된 자는 실로 이 네 분으로부터 분파되었으니 평장사의 후예(後裔) 아닌자가 없도다.

대개 선세(先世)로부터 일찍이 보첩(譜牒)이 있었으나, 중도에 병선(兵昛; 전쟁)을 겪어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족보를 강론하지 못한 지가 또한 이미 오래되었으니 이 어찌 오종(吾宗)의 흠사(欠事)가 아니리요? 내가 어릴때부터 이에 약간 뜻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일찍이 홀로 된 터라 승훈(承訓)을 받지 못하여 그 족계(族系)에 상세하지 못한 것이 있어 항상 스스로 개탄할 뿐이었다. 성장하여 공주에 살면서 전(前) 교관(敎官)인 達海(달해)가 바로 우리의 종장(宗丈)으로, 시(詩)로서 세상에 저명함을 듣고는 늘상 찾아가 뵙고 싶었었다. 그리하여 달려가 찾아뵙고는 세계(世系)를 서로 강론하여 자못 알게되었다. 이때에 신상공(申相公) 식(湜)이 순찰사로서 공산(公山)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실은 지씨의 외손인지라 또한 지씨의 세계(世系)를 찬술(撰述)하여서 내게 보여주었다. 내가 드디어 그것을 기록하고 또한 동사(東史)와 제서(諸書)를 열람하여 선조의 사적을 염출(拈出; 색출)하고, 내외(內外) 제손(諸孫)의 보고 들은 것을 따라 기록하여, 십여년이 되어서야 족보가 비로소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무릇 외손된 자들은 매우 많고 또한 현달하나, 우리 종족(宗族)은 현존하는 자가 많지 않고, 또한 능히 성립(成立)한 자가 있지 아니하니, 생각컨대 하늘이 우리 종문(宗門)을 이제 막아버려 그 불능(不能)함을 더하도록 함이신가? 그렇지 않다. 우리 선조들께서 몸소 힘써 후손을 도와주고 적선(積善)하며 유경(流慶)한 일들이 어찌 정녕 이와같이 끝나고 말겠는가?

오호라! 후손들이 비록 친하고 소원함이 있기는 하나, 나의 선조로부터 보면 그 시초는 한 몸이로다. 무릇 우리의 족보를 보는 자는 반드시 손가락으로 서로 가리켜 보며 이르기를, "모(某)는 내 선조의 몇 대의 종손(宗孫)이요, 모(某)는 내 선조의 몇 대의 외손이다"라고 하면 친애(親愛)하는 마음이 자연히 감발(感發)할 것이니, 어찌 서로를 볼 때 노인(路人)처럼 여기는 일이 다시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족보를 만드는 이유인 것이다.

아! 나의 선고(先考: 죽은 아버지)로부터 나의 고조(高祖)까지는 그 행장과 배위(配位)가 모두 그 칸에 부기(附記)되어 있으나, 다른 사람들의 경우 적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내가 이 족보를 만들기 때문에 나의 계보를 상세히 써놓지 않을 수 없어서이다. 교관(敎官)께서 나를 누(陋)하다 않으시고 족보 만드는 일을 위촉하셨고, 내가 이미 사양할 수 없었으니, 이로 인하여 서(序)하노라.

천계 원년(서기 1622년) 신유년 4월 하순에 후손 덕해가 序하다.

내가 이 서문을 삼가 살펴보건대, 평장사 공을 비조(鼻祖)로 함은 아마도 임진란 후에 보첩이 존재하지 못해서 그렇게 된 듯하다. 그후에 우리 집과 각 파 동종(同宗)의 사보(私譜)가 모두 증거가 되어 사적을 밝힘으로써 선의(宣懿)공을 비조로 전수(傳守)함이 오래되었고, 또한 이미 옛 사적을 새로 얻은 즉, 변경함이 이치에 합당하여 통지하는 고로, 족보 체제의 전후(前後)가 부동(不同)한 까닭을 적으니 보는 자는 상지(詳知)하라.

후손 덕유는 삼가 쓰다.

 

忠州池氏先蹟

中朝

我池本自中國來故,其見(현)於歷史紀籍者,采錄于篇首῁

(우리 지씨가 본래 중국으로부터 온 까닭에, 그 역사와 기적에 나타난 것을 책머리에 채록하여 둔다)

統譜曰,池望出西河,以居爲氏῁

(통보에 이르기를, 지(池)는 멀리 서하에서 나왔고,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韻書曰,林郭園池,以居爲氏῁風俗通曰,蓋姓有九,或氏于號,或氏于諡,或氏于爵,或氏于國,或氏于官,或氏于字,或氏于居,或氏于事,或氏于職,以號唐禹夏殷也,以諡戴武宣穆也,以爵王公候伯也,以國曺魯宋衛也,以]官司馬司徒司空司城也,以字伯仲叔季,以居城國園池也,以事巫卜陶丘也,以職三島五鹿靑牛白馬也.

(운서에 이르기를, 임씨, 곽씨, 원씨, 지씨는 거주지로서 성씨를 삼았다. - 풍속통에 이르기를 대개 성씨는 아홉종류가 있는데, 어떤 성씨는 號에서 그 성을 취하고, 어떤 성씨는 諡에서, 어떤 성씨는 爵位에서, 어떤 성씨는 國名에서, 어떤 성씨는 벼슬이름에서, 어떤 성씨는 字에서, 어떤 성씨는 거주지에서, 어떤 성씨는 하는 일에서, 어떤 성씨는 職業에서 성을 취했다. 號로서 취한 성씨는 당, 우, 하, 은씨이고, 諡로서는 대, 무, 선, 목씨이고, 爵位로서는 왕, 공, 후, 백씨이고 나라로서는 조, 노, 송, 위씨이고, 벼슬이름으로서는 사마, 사도, 사공, 사성씨이고, 字로서는 백, 중, 숙, 계씨이고, 거주지로서는 성, 국, 원, 지씨이고, 하는 일로서는 무, 복, 도, 구씨이고, 직업으로서는 삼도, 오록, 청우, 백마씨이다)

燮理於秦,占魁於[宋] 本註,池子華爲秦相,池夢鯉爲宋咸淳特科壯元.

(秦나라에서 섭리하고(燮理: 고르게 다스림), 宋나라에서 우두머리를 점하다. - 본주는 지자화가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고, 지몽리는 송나라 함순(;年號)간에 특과 장원하였음을 말한다)

中牟賢令,長溪名儒 本註,漢池瑗爲中牟令,有賢名,宋池光庭,端平進士,文學馳名,長溪人

(중모지방에 어진 수령, 장계지방의 이름난 선비. - 본주는 다음을 말한다. 즉, 한나라때 지원이 중모령이 되어, 어진 명성이 있었고, 송나라때 지광정이 단평(;年號)간에 진사가 되고, 문학으로 이름을 날렸다. 장계사람이다.)

後漢蔡邕陳留東昏庫上里社碑曰惟斯庫上里曰東昏縣者衛地古陽武之戶涨鄕也秦時池子華爲丞相漢興陳平由此爲社下宰遂相高祖克平天下爲右丞相孝平之世虞延爲太尉熹平中延曾孫放爲尙書令宰相繼踵咸出里乃斯社所相乃樹碑作頌 見(현)淵鑑類函(연감유현에 나온다)

(후한 때, 채옹진이 동혼 고상리에 사비(社碑)를 두면서 말했다. 오직 이 고상리만을 동혼현이라 한 것은 위나라 땅으로 옛적 양무가 살던 고향 마을이기 때문이다. 진나라 때에는 (이곳 출신의) 지자화가 승상이 되고, 한나라가 일어났을 때는 진평이 이곳에서 유래하여 사하재가 되어 마침내 한(漢) 고조(高祖)를 도와 천하를 능히 평정하여 우승상이 되고, 효평간에는 우연(虞延)이 태위가 되고, 희평중에는 연(延)의 증손 방(放)이 상서령이 되니, 재상이 끊이지 않고 이어서 모두 이 마을에서 나오니 이는 곧 이 社가 도운 것이요, 그리하여 비석을 세워 이를 기리노라)

 

池子華 秦丞相

(지자화. 진나라 승상)

池瑗 漢中牟令

(지원. 한나라 중모령)

池鄂 宋治平二年進士,候官人

(지악. 송나라(이후 宋나라) 치평 2년에 진사가 되다. 후관사람이다)

池聘 嘉定間,知宜州,平陽人

(지빙. 가정(;年號)간에 의주지방의 知事가 되다. 평양사람이다)

池從周 字子文,嘉定特科壯元,受業于朱子,黃巖人

(지종주. 자는 자문, 가정에 특과장원하고 주자에게 수업하다. 황암사람이다)

池光庭 端平進士,高州文學,長溪人

(지광정. 단평간에 진사가 되다. 고주문학에 속한다. 장계사람이다)

池夢鯉 咸淳甲戊特科壯元

(지몽리. 함순 갑무년에 특과장원하다)

池浩 皇明成化中,爲廣東香山知縣,徐州人

(지호. 황명(이후 明나라) 성화 중에 광동 향산의 지현이 되다. 서주사람이다)

池龍 正德進士,瞵鹿衛人

(지용. 정덕(:年號)간에 진사가 되다. 탁록위 사람이다)

池麟 正德中鋸鹿訓,汾州人

(지린. 정덕중에 거록훈(?)이 되다. 분주사람이다)

池浴德 嘉定進士,福建同安人

(지욕덕. 가정간에 진사가 되다. 복건 동안사람이다)

池榮 字仲先,號大明先生,精醫理

(지영. 자는 중선, 호는 대명선생, 의술에 정통하였다)


貫鄕 忠州 忠原 蘂城


忠州本高句麗國原城,新羅眞興王時置小京,景德王改中原京,高麗太祖二十三年改今名,成宗二年置牧,十四年置節度使號昌化軍,顯宗三年廢爲按撫使,九年定爲八牧之一,高宗四十一年陞爲國原京,還爲牧,本朝因之置忠州牧῁

충주는 본래 고구려 국원성이었다. 신라 진흥왕 때에는 소경을 두었고, 경덕왕 때에는 중원경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목(牧)을 두고, 14년에 절도사를 두어 창화군이라고 불렀다. 현종 3년에 폐하여 안무사로 하고,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다. 고종 41년에 국원경으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목(牧)으로 삼았다. 조선에 들어서는 그것에 연유하여 충주목을 두었다.

 


一世 癸亥十月十五日生,癸卯九月九日卒,享百一 歲῁墓中和Ҷ唐岳Ҷ華山亭

          단기  3236년(AD 903) 10월 15일생(AD 903

池鏡

 

 字自雲,號巖谷Ҷ一云樵未῁中原弘農人῁高麗光宗十一年庚申,以太學士奉使東來῁ 官金紫光祿大夫Ҷ太保Ҷ平章事῁諡宣懿῁癸亥十月十五日生,癸卯九月九日卒,享百一 歲῁墓中和Ҷ唐岳Ҷ華山亭῁

配毛氏Ҷ一云桂氏῁○一說云,公生于岐周Ҷ周樂山下,東來居中和Ҷ唐岳῁一譜云,公東 來時,辛鏡Ҷ洪鏡Ҷ郭鏡Ҷ元鏡Ҷ盧鏡Ҷ張鏡Ҷ李鏡Ҷ七學士與之俱來時,號八鏡云῁一說 云,公面黑,身白,額高,鼻長,耳後,骨高三寸,足大尺半῁

*奉使東來 : 사신(使臣)을 받들어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 아니라, 봉사(奉使)는 봉명사 신(奉命使臣)의 줄임말로서, 임금의 명을 받드는 사신의 자격으로 동래했다는 뜻 이다.

*中和 : 평안도에 있는 지역.

 

자(字)는 자운, 호(號)는 암곡, 또는 초수라고도 한다. 중원 홍농사람이다. 고려 광종 11년 경신년에 [서기 960년] 태학사로서 봉명사신(奉命使臣)의 자격으로 동래(東來)하였다. 벼슬은 금자광록대부, 태보(正一品), 평장사에 이르렀고, 시호(諡號)는 선의이다. 계해 10월 15일에 나서, 계묘 9월 9일에 졸하였으니, 101세를 누리셨다. 묘는 중화 당악산 화산정에 있다.

배(配)는 모씨, 또는 계씨라고도 한다. ○일설에 선의공께서는 기주 주악산 아래에서 태어났고, 동래(東來)시 중화 당악산에서 살았다고 한다. 또 어느 보(譜)에서는 선의공이 동래시에 신경, 홍경, 곽경, 원경, 노경, 장경, 이경 등 칠학사가 공과 더불어 함께 왔을 적에 팔경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또 일설에는 공의 얼굴은 까맣고, 몸의 빛깔은 하얗고, 이마가 높고, 코가 길고, 귀가 뒤로 젖혀져 있고, 뼈대가 삼촌이며, 발은 한척 반이나 컸다고 한다.



#. 유독 경(鏡)을 휘(諱)로 하는 성씨들의 시조(始祖)들이 꽤 있습니다. 아마도 신라말기와 고려초기에 중국에서 팔학사(八學士)들이 종종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으며, 그들이 모두 경(鏡)을 이름으로 썼는데 그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무슨 다른 내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에는 참고로 경(鏡)을 이름자로 삼는 다른 성씨의 시조들입니다. 그러나 선의(宣懿)공과 함께 동래하였다는 나머지 7경(鏡)들과는 그 동래(東來)시기를 볼 때 별 관계가 없는 분들 같습니다.

○ 郭鏡 : 현풍(玄豊) 곽씨의 시조로 관서지방의 홍농 사람으로 고려 인종11년 (서기 1133 년)에 귀화하여 금자광록대부,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고, 포산(지금의 현풍)君에 봉해졌다.

○ 辛鏡 : 영산(靈山) 신씨의 시조로 고려 인종 때 금자광록대부, 평장사,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 元鏡 : 원주 원씨 응암 운곡계의 시조로, 당나라 태종 때 우리나라로 파견왔다.

○ 魏鏡 : 중국 당나라 관서 홍농 사람으로 신라 선덕여왕이 당나라 태종에게 도예지사를 청하 자 보내준 8학사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신라에 들어와 벼슬이 아랑상서 시중에 이 르렀으며 회주(장흥)君에 봉해졌다.


 

二世 高麗 太祖  己亥生 (AD 939)

海貫

 

 

門下大雅贊成事,墓坡州郡臨津面沙?里卯坐῁

配西海郡夫人金氏,墓捽῁正廟丙午,得誌石Ҷ改封築,行歲一祭῁

*誌石 : 죽은 사람의 성명, 행적, 등을 적어 무덤앞에 묻어둔 판석(板石).

*卯坐 : 무덤의 방향, 즉 좌향(坐向)을 말한다. 묘(卯)는 그 방위(方位)를 나타낸다.

*封築 : 무덤을 만들기 위해 흙을 쌓아 올림.

 

벼슬은 문하대아찬성사, 묘는 파주군 임해면 사?리 묘방향에 있다. [*현존한다*]

배(配)는 서해군부인 김씨, 묘는 합장. 조선 정조(正祖) 병오년에 지석을 찾아, 봉축을 고쳐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三世 高麗 光宗 甲戊生 (AD 749)

瀛(영) 해관의 둘째아들, 첫째는 胤(윤)

  

副元帥

配安氏῁父判書繼泳῁墓庭山῁

벼슬은 부원수.

배(配)는 안씨, 부(父)는 판서벼슬의 이름은 계영이고, 묘는 정산이다.

 

 

四世   高麗穆宗庚子生(AD 1000)

得尙(득상)

 

平章事

配庾氏,墓長湍῁

벼슬은 평장사.

배(配)는 유씨이고 묘는 장단에 있다.



五世 顯宗甲午生 (AD 1024)

(나무 목 木변의 及자)

 

字天一,號雲谷῁領同政῁

配門氏῁父中郞將必遠῁墓衿川῁

 

자는 천일, 호는 운곡이며, 벼슬은 영동정이다.

배(配)는 문씨, 부(父)는 중랑장, 이름은 필원이다. 묘는 금천.


六世  文宗任辰生(AD 1052)

宗海(종해)

 

字文淑,號雲巖῁門下侍郞平章事,封忠原伯,娶居忠州,因以爲貫῁事載靑邱事林及海東姓譜῁

配金氏῁父平章事汝信῁墓上同῁

*忠原 : 지금의 忠州의 옛 이름.

 

자는 문숙, 호는 운암,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 충원백에 봉해졌고, 충주에서 장가들어 살았다. 그러한 연유로 그곳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이 사실은 청구사림과 해동성보에 실려 있다.

배(配)는 김씨, 부(父)는 평장사벼슬의 이름은 여신. 묘는 위와 같다.

 

(六世)   

重翼   충주어씨의 시조

平章事῁公狀貌奇異,腋下有三鱗῁麗王異之,賜姓魚氏῁按魚氏譜,公以上五世諱啣載傍註,而但以公爲麗祖時(?始)

配金氏

*傍註 : 족보에서 선조의 諱(죽은 사람의 이름을 휘라 한다.)옆에 그 생졸연일, 행적, 배위(配位) 등을 적어 놓은 것, 또는 그 적는 장소.

벼슬은 평장사이며, 공의 생김새가 기이하고, 겨드랑이 아래에는 물고기 비늘이 세 개가 있어, 고려왕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겨 어씨성을 주었다. 충주 어씨보(譜)를 보건대, 공의 위로 5세조의 이름을 방주에 싣되, 단 공을 고려조의 시초로 삼고 있다. [時자는 始로 써야 옳을 것 같다.]

배(配)는 김씨.


#. 어씨에는 충주 어씨와 함종 어씨가 있다. 참고로 충주 어씨의 인구수는 1985년 기준으로 3,053명이고, 함종 어씨는 同年기준으로 10,952명이다. 충주 지씨는 同年기준으로 118,410명이다. 충주 어씨 중에는 조선 세종 때의 공신 어유소(魚有沼)가 유명하며, 그가 예성군(蘂城君, 예성은 충주의 옛 지역명)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충주로 삼았다.


七世 高麗文宗庚申生(AD1080)

憲 (헌)

字希瞻,號省谷῁門下平章事῁諡文道῁

配卞氏῁墓庭山῁

자는 희첨, 호는 성곡, 벼슬은 문하시랑평장사, 시호(諡號)는 문도이다.

배(配)는 변씨, 묘는 정산이다.

 


八世   高麗肅宗任午生(AD 1102)

愼耉 (신구)

 

字子益,號獨齋῁刑部尙書,門下平章事῁諡恭道῁

配李氏῁墓豊德῁

 

자는 자익, 호는 독재, 벼슬은 형부상서,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공도이다.

배(配) 는 이씨, 묘는 풍덕이다.


九世 高麗仁宗乙巳生(AD 1125)

 

禮部尙書῁

配許氏῁墓上同῁

벼슬은 예부상서.

배(配)는 허씨, 묘는 위와 같다.


十世 穆宗秉午生(AD 1150)

好文 (호문)

 

字淸淑,號梅軒῁門下平章事῁諡忠簡῁

配李氏῁父尙書根῁墓交河῁

자는 청숙, 호는 매헌, 벼슬은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충간이다.

배(配)는 이씨, 父는 벼슬이 상서, 이름은 근이다. 묘는 교하이다.


(十世)

資深 (자심)

平章事῁按麗史,明宗十六年,公爲按撫使,征耽羅῁神宗五年,拜慶尙按察使῁

配金氏,墓洪山

*耽羅 : 제주도의 옛 이름

*拜 : 벼슬을 제수하다.

 

벼슬은 평장사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명종 15년, 공이 안무사가 되어 탐라를 정벌하였다. 신종 5년에는 경상도 안찰사에 제수되었다.

배(配) 는 김씨이고, 묘는 홍산이다.

#. 고려사(高麗史)에 공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즉, 위에서 기술한 공의 행적은 고려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秀 (수)

平章事῁

配裵氏῁墓交河῁

벼슬은 평장사이다.

배(配)는 배씨이고, 묘는 교하이다.


十二世 神宗壬戊生(AD 1202)

聖三 (성삼)

 

吏部尙書῁集賢殿太學士῁

配唐氏῁父永修῁墓長湍῁

벼슬은 이부상서, 집현전 태학사를 지냈다.

배(配) 는 당씨이고, 父의 이름은 영수이다. 묘는 장단이다.



十三世 高麗高宗乙酉生(AD 1225)

翕 (흡)

 

字和之,號寒竹῁門下平章事῁諡忠文Ҷ一本作良簡῁

配趙氏῁墓交河῁

*一本 : 어느 책, 다른 책.

자는 화지, 호는 한죽, 벼슬은 문하평장사이고, 시호(諡號)는 충문, 또는 어느 본(本)에는 양간이라고도 되어 있다.

배(配)는 조씨이고, 묘는 교하이다.



十四世 高麗高宗任子生(AD1252)

德老 (덕노),  둘째 德溟(덕명)

 

字聖華,號石川῁戶部尙書,平章事῁居松京左樂谷῁

配光山金氏῁墓開城Ҷ西面Ҷ石城山南後Ҷ西江Ҷ亥坐῁

자는 성화, 호는 석천, 벼슬은 호부상서, 평장사이고, 송경 좌락곡에 살았다.

배(配)는 광산 김씨, 묘는 개성 서면 석성산 남쪽아래 서강이며, 좌향은 해방향이다.

 


十五世 高麗忠列王乙亥生(AD 1275)

演(연)

 

贊成事,贈門下平章事῁

配宋氏῁墓楊州῁

벼슬은 찬성사, 문하평장사에 추증되다.

배(配)는 송씨, 묘는 양주이다.

 


十五世,  13세 흡의 손자요, 13세 흡의 둘째 아들 덕명의 아들)

奫 (윤)

 

吏部尙書῁按麗史,公以贊成事屢立戰功῁禑王三年,以李仁任黨下獄死῁子益謙從坐῁

配順興安氏῁墓豊德῁

벼슬은 이부상서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공은 찬성사로서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우왕 3년에 이인임의 무리로 몰려 옥사하였고, 아들 익겸은 따라 죽었다.

배(配)는 순흥 안씨, 묘는 풍덕이다.

#. ?∼1377(우왕 3). 고려의 무신(武臣). 무녀(巫女)의 소생으로서 [父는 員外郞 諱 德溟] 처음 군졸에서 출발하였으나 점차 무공을 세워 공민왕 말년에는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었으며, 서북면원수·경상도 상원수 등 출정군(出征軍)의 지휘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우왕 때에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재상에 올랐는데, 당시의 권신(權臣)인 이인임(李仁任)과 한패가 되어 친원 정책을 비판하는 임박(林樸)·정도전(鄭道傳)·박상충(朴尙衷) 등을 탄압하였다. 관직과 옥(獄)을 팔아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심복들을 대간에 배치, 그들을 사주하여 위복(威福)을 부렸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익겸(益謙)을 왜구토벌의 지휘관으로 내보내는 문제 등으로 점차 이인임과 사이가 나빠졌는데, 기회를 엿보던 이인임이 김승득(金承得)·이열(李悅)·화지원(華之元)【高麗史에서는 이들이 스스로 지문사걸(池門四傑)이라 자칭했다 함】 등 지윤의 심복들을 정부비방죄로 몰아 유배시키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지신사(知申事) 김윤승(金允升)과 공모하여 이인임·최영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함으로써 가족·당여(黨與)와 함께 처형되었다. (以上,高麗史姦臣篇, 高麗史節要, 朝鮮太祖實錄]

윤의 아들 益謙,  得鱗은 족보에 별 기사가 없고,

 

첫째딸

鎭安大君 芳雨

諡靖懿῁子奉寧君福根Ҷ元尹德根῁女李叔畝῁知敦寧Ҷ叔畝Ҷ曾孫Ҷ潸參贊Ҷ號陰崖῁

公의 딸은 진안대군(鎭安大君) 방우(芳雨, 太祖의 長子로서 開國후 얼마 안 있어 卒하였다)에게 출가하였다.

公의 딸의 시호(諡號)는 정의(靖懿)이다. 아들은 둘로서, 봉녕군 복근, 원윤 덕근이다. 여식은 이숙무에게 출가하였고, 지돈녕 이숙무의 증손 자(潸)는 벼슬은 참찬, 호는 음애(陰崖)이다.

 둘째딸

淑儀

子義平君元生Ҷ宣城君茂生Ҷ德泉君厚生Ҷ任城君好生Ҷ桃平君末生῁女咸陽郡(?)主下嫁知敦寧朴?,桃平君女鄭如昌Ҷ號一履,從享文廟῁

公의 둘째 여식은 숙의(淑儀; 내명부 품계의 하나) 이다.

아들은 다섯으로 의평군 이름은 원생, 선무군 무생, 덕천군 후생, 임성군 호생, 도평군 말생, 여식은 함양군주(?) 지돈녕 박?에게 시집가고, 도평군의 여식은 정여창에게 출가하였다. 정여창의 호는 일두, 문묘에 종향(從享)하다.



十五世, 忠文公,諱翕의 孫) 13세 흡의 손자요, 13세 흡의 세째 아들 元夫의 아들)

 

桓 (환)

 

字達之῁侍中,平章事῁按成氏譜,書以右司諫,墓聞慶῁

配昌寧曹氏῁父領同政Ҷ植文῁

자(字)는 달지. 벼슬은 시중, 평장사. 창녕 성씨보를 보건대, 벼슬이 우사간으로 적혀 있다. 묘는 문경.

배(配)는 창녕 조씨. 父는 벼슬은 영동정, 이름은 식문.

(子) 龍圖 : 아래 참조.

(子) 龍壽 : 아래 참조.

(女) 成文弼

昌寧人῁版圖判書῁父侍中Ҷ松國῁子成君美摠郞Ҷ君阜侍郞῁女朴仁典Ҷ曹檅判書Ҷ卞玉蘭吏判῁君美八世孫Ҷ成渾諡文簡Ҷ從享文廟῁

公의 여식은 창녕사람, 성문필에게 출가함. 벼슬은 판도판서이고, 父는 벼슬은 시중, 이름은 송국이고, 아들은 첫째는 성군미 벼슬은 총랑, 둘째는 이름이 군부 벼슬은 시랑이다. 딸은 셋으로 각각 박인전, 판사 조연, 이판 변옥란에게 출가했다. 군미의 팔세손은 성혼(成渾)으로, 시호는 문간이고 문묘에 종향(從享)되다.

 

十六世) 十五世諱桓公의 長子.

龍圖

 

字雷聲,號月亭῁侍郞平章事,上元帥,諡忠懿῁忠穆朝,與崔瑩Ҷ安遇慶Ҷ李珣Ҷ朴椿 竝受勳,事載麗史῁

配密陽朴氏῁父中郞將忠遠῁墓聞慶麻城面鼎谷聖主峯下村後慶坐合捽,端宗癸酉之禍, 失傳῁至高宗乙丑,尋奉(?)改築,置祭田,具石儀῁

 

자는 뇌성, 호는 월정, 벼슬은 시랑평장사, 상원수, 시호는 충의, 충목왕 때에 최영, 안우경, 이순, 박춘 등과 더불어 공을 세웠다. 이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배(配)는 밀양 박씨, 父는 중랑장, 이름은 충원이고, 묘는 문경 마성면 정곡 성주봉 아랫 마을 뒷편, 좌향은 경방향, 합장되어 있다. 단종조 계유년의 화가 있을 때, 묘를 실전하였으나, 고종 을축년에 이르러, 봉분을 [奉은 封의 誤字] 찾아 개축하여, 제전을 마련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묘는 현존한다*]

#. 단종 "계유년의 화"로 묘를 실전하였다는 것은, 공의 5대손인 절제사(節制使) 봉원(逢遠)공이 안평대군의 무리로 몰려, 단종 폐위시 연류되어 화를 입었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후에 절제사 공은 복권되고 그 분을 추모하는 뜻에서 안동(安東)에 우송정(友松亭)을 세웠다. (아래 참조)

 


十六世 十五世 諱桓公의 二子

龍壽

 

字河聲,號月松῁匡靖大夫,門下侍郞兼西北面上元帥,贊成事,諡忠武῁按麗史, 公當恭愍朝屢立戰功῁詳見(현)文獻誌῁

配金氏῁

 

자는 하성, 호는 월송, 벼슬은 광정대부, 문하시랑 겸 서북면 상원수, 찬성사이고, 시호는 충무이다. 고려사(高麗史)를 보건대, 공민조에 당하여 여러번 전공을 세웠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와 있다.

배(配)는 김씨.

#. 고려의 대신(大臣). 충목왕 때 현릉직(顯陵直)을 거쳐, 1362년(공민왕 11) 판전객시로서 서북면 지병마사가 되고, 앞서 홍건적 침입 때 안우(安祐)를 도와 경성 수복에 공을 세워서, 이듬해 1등 공신이 되었으며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전공판서(典工判書)에 이르러 규의선력공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 덕흥군(德興君) 혜가 원나라에 의해 고려왕에 임명되어 입국한다는 소식이 있자, 전공판서로서 서북면 도순무사가 되어 용주(龍州, 지금의 龍城)에 주둔하였다가 덕흥군이 물러간 뒤 추성규의선력공신(推誠揆義宣力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1365년 밀직사, 지도첨의·상원수(知都僉議上元帥)가 되고,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교동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 1367년 서북면 도순문사가 되었다. 1369년 서북면 상원수·평양윤이 되고, 이듬해 원나라에서 평장사를 지낸 기새인티무르(奇賽因帖木兒)가 김빠이앤(金伯顔) 등과 동녕부를 근거로 서북면에 침입하자 부원수 양백안(楊伯顔), 안주상만호 임견미(林堅味), 이성계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이를 물리쳐 동녕부를 회복하고 북원과 국교를 단절케 했다. (以上,高麗史池龍壽篇, 高麗史節要)

(子) 瓚 : 吏曹佐郞῁太祖革正之初,以不服臣謫明川῁後徙鏡城῁

配裵氏῁墓明川西面古城洞橡原,失傳῁

벼슬은 이조좌랑, 태조의 혁정(革正) 초기에 불복신(不腹臣)으로 명천에 유배되고, 후에 경성으로 이주하였다.

配는 배씨. 묘는 명천 서면 고성동 상원이나, 실전하였다.

(子) 哲 : 贊成事錄秉義翊戴從勳 (벼슬은 찬성사. 병의익대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기록됨)

配朴氏 (配는 박씨)

(子) 臧 :參贊 (벼슬은 참찬)

配金氏 (配는 김씨)

(女) 崔荷

海州人少尹῁父漢城尹安海Ҷ忠憲公有模玄孫῁子崔萬里副提學῁萬里子靖監司Ҷ(土+奐)典籍Ҷ女李宜碩判官῁宜碩曾孫珥Ҷ諡文成公,從祀文廟῁崔환八世孫奎瑞領議政῁

公의 딸은 최하에게 출가하다. 해주사람으로 벼슬은 소윤이다. 父는 벼슬은 한성윤, 이름은 안해이며, 충헌공 유엄의 현손이다. (최하의) 아들은 최만리이고 벼슬은 부제학. 만리의 자식은 2남 1녀로, 정(靖)은 벼슬이 감사, 환(土+奐)은 벼슬이 전적, 딸은 판관 이의석에게 출가했다. 의석의 증손은 이(珥, 栗谷先生)로 시호는 文成이다. 문묘에 종사(從祀)하다. 최환의 팔세손은 영의정 규서(奎瑞)이다.

 


 

十六世 高麗忠列王辛丑生(AD 1301)

福龍

 

門下贊成事,判戶曹事,軍器尹῁追錄秉義翊戴Ҷ佐命功臣῁謹按後孫德海所撰譜序, 則略曰,{公佐忠惠王,其子忠義君歷事恭愍Ҷ恭讓},立朝,名節與圃牧竝筊(?),及 至革命之際,不免得罪,竄謫三年,而沒于壬申四月,則計其時,公之不在世,久矣, 而入於佐命勳籍,則不無後人之感῁竊想,公於太祖有潛龍舊契,嘗秙衛危難之際,而 追錄其功也῁詳見(현)文獻誌῁

配永嘉郡夫人宋氏῁墓唐津合德素素里台谷坤坐雙墳῁壬丙之亂失傳῁高廟再壬辰,後孫 憲宗Ҷ憲英尋奉(?)築,具石儀,後孫載泉撰墓文῁行歲一祭῁

*歷事 : 대대의 임금을 섬김.

*竊 : 은밀히, 몰래, 가만히

*潛龍 : 아직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石儀 : 무덤앞에 세워 놓는 갖가지 석조물들.

*筊 : 오자(誤字)인 듯하다. 술어가 쓰여야 하는데(拄+술어), 아래에서는 문맥상 맞게 풀었다.

벼슬은 문하찬성사, 판호조사, 군기윤을 지냈고, 병의익대좌명공신으로 추증되었다. 후손 덕해공이(池德海 : 구보 서문을 썼다.) 지은 족보 서문을 삼가 살펴보건대, 즉 "공은 충혜왕을 보좌하고, 그 아들 충의군은 공민·공양왕을 대대로 섬기었다."라고 간략히 말하고 있다. 입조(立朝)하여서는 포은, 목은과 더불어 명의와 절개로 함께 일컬어졌으니, 역성혁명의 시기에 이르러는 죄를 면하지 못하였다. 유배된 후 3년이 되어서, 임신년 4월에 죽은 즉, 그 때를 계산해봄에 공이 세상에 있지 않음이 오래 되었는데도 좌명훈적에 들어 있으니 후인들이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공이 태조에게 잠룡시절에 오래된 약속이 있어 일찍이 위난의 시절을 지켜낸 것으로 그 공을 추록한 듯 하다. 문헌지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배(配)는 영가군부인 송씨이고, 묘는 [현재] 당진군 합덕면 소소리 태곡에 있으며, 좌향은 곤방향이고, 쌍분으로 되어 있다. [예전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그 묘를 실전하였으나, 고종때 다시 임진년에 후손 헌종, 헌영등이 봉축[奉築이 아니라, 封築이 옳음]을 찾아내고, 석의를 갖춘 다음, 후손 재우가 묘문을 지었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묘는 현존한다*]


 

  

 

十七世  高麗忠肅王병庚午生(AD 1330)

湧奇 (용기)

 

 號毅齋῁碧上三韓三重大匡,判三司事,判戶曹事,門下平章事,錄忠義君Ҷ忠原府院 君῁恭愍祖屢除三司事῁禑昌之祭,從太祖與鄭夢周等,策立恭讓王,擢門下贊成事, 賜中興功臣號,錄忠義君῁二年庚午,彛初獄起,流于三陟,尋許外方從便遂居沔川, 卒于壬申四月῁詳見(현)文獻誌῁

配永嘉郡夫人利川徐氏῁父承旨泗,祖執義漪,曾祖禮賓尹瓚,外祖判書礪山宋自淵῁墓 唐津合德石隅里粉土洞Ҷ子坐合捽῁○壬丙之亂失傳,而正廟庚申後孫海鎭得誌石,改封 築,具石儀,置祭田῁謹按甲午譜及己酉譜,則公流于三陟,移于沔川,太祖革正之際以 下,棘圍甚嚴,遂不食十三日而卒῁以上事實與國史相違故,姑略之不記,而以俟後人 辨正矣῁

*彛初의 獄 : 고려말 이성계의 세력이 커지자, 명나라 사신으로 있던 尹彛와 李初가 명 황제에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어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 당시 사 신으로 명나에 머물러 있던 순안군(順安君) 방(昉),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조반(趙懈)이 돌아와 그 사실을 왕께 알렸으므로 공양왕 2년 (1390년) 옥사 가 크게 일어 났으니 이를 彛初의 獄이라 한다.

*流 : 유배(流配)되었다는 뜻.

*遂 : 마침내.

*尋 : 얼마 있다가

*棘圍 : 가시로 둘레를 친다는 말로, 여기서는 역성혁명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을 감시(감금?)한다는 의미인 듯 하다.

*姑 : 우선



    호는 의재, 벼슬은 벽상삼한삼중대광, 판삼사사, 판호조사, 문하평장사, 충의군, 충원부원군에 올랐다. 공민조에 삼사사를 여러번 제수하였다. 우왕, 창왕 때에는 태조와 정몽주 등을 따라 공양왕을 책립하여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의 호를 받고, 충의군에 올랐다. 공양왕 2년 경오년에, 이초의 옥이 일어나자 삼척에 유배되었고, 얼마 안 있어 외방에서 편리를 따르도록 허락되어 마침내 면천에서 거처하다가 임신년 4월에 졸하였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배(配)는 영가군부인 이천 서씨, 부(父)는 승지벼슬의 이름은 욱, 조(祖)는 집의벼슬의 이름은 인, 증조(曾祖)는 예빈벼슬의 이름은 윤찬, 외조(外祖)는 여산 송씨의 이름은 자연이다. 묘는 당진군 합덕면 석우리 분토동에 소재하고 좌향은 자(子)방향, 합장되어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묘를 실전하였으나, 정조 경신년에 후손 덕진이 지석을 찾아내고, 봉축을 고치고, 석의를 갖추고, 제전을 두었다. [*묘는 현존한다*] 갑오보와 을유보를 삼가 살펴 보건대, 공이 삼척에 유배된 후, 면천으로 이주하였는데, 태조의 혁정의 시절이래로 극위가 매우 심하여 마침내 13일간 단식하다가 졸하였다고 하는데, 이상의 사실은 국사와 상위한 고로, 우선은 생략하고 기록하지는 않으니, 이것으로써 후인이 바로 밝혀주기를 기다리노라.

#. ?∼1392(공양왕 4). 고려의 대신(大臣). 공민왕 때에 삼사우윤에 이르고, 우왕 때에 예의판서에 전보되었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여 수성분의공신(輸誠奮義功臣)의 호를 받았다. 1378년(우왕 4)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어 장흥부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으나 1381년에 지밀직사사로서 전라도원수(全羅道元帥)가 되어 사근내역(沙斤乃驛)에서 패퇴하여 파직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양광·전라·경상도 조전원수(楊廣全羅慶尙道助戰元帥)로 기용되어 원수 이을진(李乙珍)과 함께 반남현(潘南縣)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84년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전라도도원수가 되었고 이어 전라도도순문사로 다시 나가 왜를 쳤다. 1388년에는 요동(遼東) 정벌에 안주도부원수로 참가하였다가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의 편을 들어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9년(공양왕 1)에는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문하찬성사에 발탁되었으며 중흥공신녹권(中興功臣錄券)을 받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하여졌다. 그뒤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지냈으나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된 김종연(金宗衍)의 당인(黨人)으로 지적되어 탄핵을 받아 삼척에 유배되었다. 당시의 대사헌 김사형(金士衡) 등이 그의 죄를 덜어 공신과 공신녹권만 거두자고 하였으나 낭사(郎舍) 진의귀(陳義貴)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하여 삼척에 귀양보냈으며 가산은 적몰(籍沒)하였다. 1391년 처(妻)의 재종(再從) 왕익부(王益富)가 충선왕의 증손이 된다고 자칭하는 것을 정양군(定陽君) 우(瑀)가 알고서 용기가 왕씨의 후예를 숨겨두었다가 후에 모반하여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이라하여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벽지에 감금하였으나, 뒤에 사면받고 귀양지에서 죽었다. 비록 역모와 관련되어 불우한 최후를 맞기는 하였으나, 그의 행동은 전장(戰場)에서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에 비교되었으며,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 [두 사람은 唐나라 때,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명장]과 같은 자질을 소유한 자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以上, 高麗史池湧奇篇, 高麗史節要, 朝鮮太祖實錄,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사교과서에 公이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물리쳤다는 내용이 나왔었는데 요즘도 있는지 궁금함)

 

아들: 有容  

딸   :

   女,崔용

海州人,書雲觀副正῁父摠郞得全῁忠憲公有模曾孫῁世祖丙子以昭陵外祖被禍῁子崔崙,女權專花山府院君Ҷ諡景惠,誕顯德王后῁

公의 딸은 해주사람 최용에게 출가하다. 벼슬은 서운관부정이다. (최용의) 父는 벼슬은 총랑, 이름은 득전이고, (최용은) 충헌공 유엄의 증손이다. 세조 병자년에 소릉(단종의 어머니인 덕혜왕후의 능)으로 인하여 (최용의) 외조는 화를 입다. (최용의) 아들은 이름이 최륜이고, (최용의) 딸은 화산 부원군 권전에게 출가하다. 부원군의 시호는 경혜이고, 덕혜왕후를 낳았다.

毅齋公이 忠義君에 봉해졌을 때의 敎旨:

敎曰:"卿以英邁之資,雄偉之器,常懷郭李之忠實,兼關張之勇῁撫軍則有捦循之效,臨陣則有敵愾之功῁自玄陵賓天,姦猾用事,禑昌父子漎緣竊位,濁亂紀綱,傷敗彛倫,九廟震驚῁卿與侍中李成桂奮不顧身,決義定策῁以予於王氏最親,搋承正統旣墜之緖,得以復續已絶之祀,得以血食῁其視平勃之安劉漢,狄張之復李唐,爲有光焉῁嘗命有司崇爵以封祖考,立閣以圖形像῁嫡長襲忠義之號,支庶蒙永世之宥῁錫之土田兼及臧獲῁尙慮功鉅賞微,不足勸後῁今賜卿銀錠馬匹絹帛." (高麗史/列傳/池湧奇篇)

경(卿)은 영매(英邁)한 자질과 웅위(雄偉)한 기량으로 항상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과 같은 충실(忠實)을 마음속에 지니고, 관우(關羽)와 장비(張飛)의 용맹을 겸하였으니, 군사(軍士)들을 위무할 때는 부순(捦循)의 효(效)가 있으며, 전진(戰陣)에 임해서는 적개(敵愾)의 공(功)이 있었다. 현릉(玄陵: 恭愍王으로 생각됨)께서 붕어하신 뒤로 간활(姦猾)한 무리들이 용사(用事)하니, 우창(禑昌) 부자(父子)가 끼어들어 왕위를 훔쳐, 기강(紀綱)을 어지럽히고, 이윤(彛倫)을 해쳤으니, 구묘(九廟)가 진경(震驚)하였다. 경(卿)은 시중(侍中) 이성계와 함께 분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결의(決義) 정책(定策)하여, 내가 왕씨 혈통에 가장 가깝기에, 벌써 떨어진 정통(正統)의 실마리를 잇게하였으니, 이미 끊어진 제사를 다시 잇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보면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한(漢)나라를 안정시키고, 적인걸(狄人傑)과 장간지(張柬之)가 당(唐: 두사람은 唐나라의 中興功臣임)나라를 회복했던 것과 같은 찬란함이 있다. 일찍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관작을 높여 조고(祖考)를 봉하고(:15世 諱演公은 위에서 보았듯이 門下平章事에 추층되었음), 각(閣)을 세워 그 형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그 적장(嫡長: 諱湧奇公을 가리킴)은 충의(忠義)의 호(號)를 받고(: 忠義君에 봉해진 것을 말함), 그 지서(支庶: 毅齋公의 남동생이 셋이 더 있음)는 영세(永世)의 유(宥: 조그만 죄과는 면제함)를 입게 되었으며, 토전(土田)과 노비를 하사하였다. 그런데 그 공(功)이 큰 데, 그 상(賞)이 작음을 생각하면,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기에 부족하여, 이제 경(卿)에게 은정(銀錠)과 마필(馬匹), 견백(絹帛)을 하사하노라.

 

十八世  高麗恭民王癸卯生(AD 1363)

 

有容

  李朝世宗朝,官忠淸按撫使Ҷ判義州牧῁謹按忠淸水使先生案,公以宣德辛亥到任,壬 子陞鍾城節制以去῁墓楊州渼金面加雲里加佐谷亥坐῁

配貞夫人崔氏῁父牧使允祐,外祖文貞公綾城具緯῁墓公墓階下Ҷ子坐,俱有墓碣῁

 

 

*水使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줄임말.

이조 세종조에,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충청안무사, 판의주 목사, 그리고, 충청 수사선생의 안(案)을 삼가 살펴 보건대, 公은 덕을 베풀어 신해년에 도임하였고, 임자년에 종성 절제사로 승진하여 떠났다라고 되어 있다. 묘는 양주군 미금면 가운리 가좌곡에 소재하고 좌향은 해(亥)방향이다. [*묘는 현존한다* *以下다른 조상들의 경우도 모두 묘는 현존한다]

배(配)는 정부인 최씨, 부(父)는 목사벼슬의 이름은 윤우, 외조(外祖)는 문정공 능성 구씨의 이름은 위이다. 묘는 공의 묘의 한 단(段) 아래에 있고, 좌향은 자(子)방향이다. 두 묘 모두 묘의 비석이 있다.

#. 高麗史池湧奇篇 참고하시기 바람.

#. 世宗實錄에 公에 대한 언급이 10여 차례 나오니 참고하시기 바람.

제가 세종 실록을 열람하였는데 열람할 당시 정리해두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지금 기억에 남아 있기로는 公은 위에서 언급한 벼슬 외에도 여러 벼슬을 두루 거치셨고, 卒하였을 때는 나라에서 관리를 보내어 조문(弔問)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실록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선대의 휘(諱)를 가만히 상고해 볼 때, 시조(始祖) 선의(宣懿)공으로부터 20世祖까지 이름자가 한 글자, 두 글자, 한 글자, 두 글자 이런식으로 규칙성을 보인다. 이러한 규칙성이 지켜지지 않는 계통도 있지만 대체로 상당히 잘 지켜져 내려왔다. 지금과 같은 항렬자를 지켜서 작명(作名)한 것은 어느 성씨이든 조선 초기를 지나서 중기에 접어 들면서의 일로서 고려 시대에는 어느 성씨이고 항렬자를 쓰지 않았지만 충주 지씨 선세(先世)들의 휘(諱)자가 일정한 규칙을 보인다는 것은 우연이라기 보다는 제 개인적인 생각에 이는 아마도 충주 지씨 선조들께서 작명시 지켜온 내력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봅니다.



#. 충주 지씨는 21세조를 분파조(分派祖)로 하여 40여개의 파로 나누어진다. 단, 27세손인충성군(忠城君)의 후손은 참의공파에서 분파하여 충성군파로 나누어진다.


#. 이상으로 고려시대까지의 조상의 계보를 간략히 마치고, 조선시대 조상의 내력은 그 계보가 방대하므로, 역사적으로 이름난 몇몇 분과 백호의 지계만 시었습니다.

 

(上元帥,諱龍圖公의 五代孫, 二十一世)

二十一世

逢源

一諱淨,字希容,號友松亭῁世宗辛亥生,文宗庚午文科῁以特旨拜判司僕寺事῁端宗 癸酉以都承除忠淸道節制使,未赴而坐῁安平大君黨Ҷ謫靈岩,尋被禍,卽是年冬十一 月十日也῁事載三宗實錄Ҷ莊陵誌與東鶴招魂記及國朝實錄῁正朝辛亥享莊陵配食壇, 端宗後八癸酉築友松亭于安東郡臥龍面佳邱洞松亭里,以寓景慕῁丁亥春同鄕儒林因以 祖(俎?)豆之,刊行實紀一卷῁詳見(현)文獻誌῁

配貞夫人密陽朴氏῁父進士東春῁(墓?)廣州北面外槐德里῁

또 다른 휘(諱)는 정(淨, 實錄에는 바로 이 諱字로 되어 있다)이라고도 한다. 字는 희용, 號는 우송정(友松亭)이다. 세종 신해년에 나셨다. 문종때의 경오 문과에 급제하여서 임금의 특지(特旨)로 판사복시사를 제수하다. 단종 계유년에 도승지로서 충청도 절제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卒하였다. 안평대군의 무리로 영암에 유배되고, 이에 화를 입으니 바로 이 때가 겨울 11월 10일이었다. 이 일은 삼종실록, 장릉지와 동학초빙기, 그리고 국조실록에 실려 있다. 정조 신해년에 장릉(莊陵: 단종의 능)에 배향하고 식단을 올렸다. 단종으로부터 8계유년에 우송정을 안동군 와룡면 가구동 송정리에 세워서 경모의 뜻을 두었다. 정해년 봄에 동향(同鄕)의 유림들이 이로 인해 제사를 지내고(祖는 俎의 誤字임), 실기(實紀) 한 권을 간행하였다. 문헌지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배(配)는 정부인 밀양 박씨. 부(父)는 진사(進士)로 이름은 東春, (묘는?) 광주북면 외괴덕리.

#. 1444년(세종 26) 삼군진무(三軍鎭撫)로서 경상도 선위관에 차견(差遣)되어 왜구의 침입으로 소란된 민심을 무마시켰다. 그뒤 1448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파견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 입조하여 특지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에 발탁되었고, 다음해 첨지중추부사가 되면서 정평도호부사(定平都護府使)를 겸직하였다. 1453년(단종 1)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제수되어 부임을 기다리던 중, 계유정난이 일어나면서 수양대군(首陽大君)일파에 의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과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논죄되어 전라도 영암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그해 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이양(李穰)·민신(閔伸) 등과 함께 교살되었다. (以上, 文宗實錄, 端宗實錄, 燃藜室記述.)


 

 

 

二十一世 李朝世宗王 己巳生(AD 1449)

允源(윤원)

 

潭陽府使

贈중吏曺參議

 

 

二十二世

漢生 (한생)(셋째아들),  첫째는 漢祖, )吉城縣監 贈 參判,成宗乙未生 中宗己亥卒(AD 1475-1539

                                                            둘째는 漢宗,

鏡城判官 ;  둘째와 셋째는 장자의 그늘에 밀려서, 생년월일도 기재되지 않고 있다. .                                         

 

二十二世(毅齋公諱湧奇第二孫少尹公諱浩第二子縣監公得禮派,縣監公의子)

達河

 

字巨源῁進士῁成化乙酉文科,吏曹正郞,承文校理῁

配鎭川宋氏,父允商,祖殿直傳,曾祖郎將匡度῁

配原州金氏῁父府使由敬,祖正郞連幹,曾祖判書乙辛,外祖府使順興安至善῁墓承旨公 墓下Ҷ子坐,有墓表῁謹按公以吏文精明,載於國朝榜目῁少時與梅月堂金公時習同 學,情若兄弟,見(현)梅月堂集῁詳見(현)文獻誌῁

字는 거원, 진사(進士), 성화(:중국연호)간에 을유 문과에 급제. 벼슬은 이조정랑, 승문교리.

配는 진천 송씨. 父는 윤상, 祖는 전직 벼슬의 이름은 전. 曾祖는 낭장 벼슬의 이름은 광도.

配는 원주 김씨. 父는 부사 벼슬의 이름은 유경, 祖는 정랑 벼슬의 이름은 연간, 曾祖는 판서 벼슬의 이름은 을신, 外祖는 부사 벼슬의 순흥 안씨 이름은 지선. 묘는 승지공 묘 아래로 좌향은 자(子)방향. 묘표가 있다. 삼가 보건대, 공은 이문(吏文:중국과의 외교 문서)에 정통하였다. 그리고 국조방목(國朝榜目: 과거 급제자 명단)에 실려 있다. 어릴 적에는 매월당 김시습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그 정이 마치 형제와 같았다고 매월당집에 나온다. 자세한 것은 문헌지에 나와 있다.
 

 

 

二十三世  

世蓮(세련)

 

江陵府史

贈吏曺參議


                               

 

二十三世 (毅齋公曾孫郭山公諱繼江長子經歷公諱允溫派, : 원문과 配位는 족보참조바람)

世涵

생부(生父)는 한보(漢輔)이고, 자(字)는 양중(養仲)이다. 중종(中宗) 갑신(甲申) 생(生)이다. 진사(進士), 조지서(造紙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옳은 행실과 도의(道義)로 조정(朝廷)에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정해(丁亥)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 64살이었다. 막내 아들, 달기(達沂)가 정사종훈(靖社從勳)에 오르자 좌승지(左承旨)에 추층되었다. 묘(墓)는 선영(先塋), 왼쪽 기슭, 좌향(坐向)은 경좌(庚坐)이다. 청음(淸陰) 김(金) 문정공(文正公)이 묘문(墓文)을 찬(撰)하였으니, 이르기를, "어찌 하필(何必) 소학(小學)을 읽을 필요가 있으랴? 그저 지씨(池氏) 집안을 보면 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달해(達海), 달문(達汶), 봉휘(鳳輝) 씨 등이 효성순행(孝性純行)으로 선인군자(先人君子: 別提公을 가리킴)를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공(公)이 바로 자신의 몸으로 가르친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하였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쓰다.

(經歷公派, 別提公의 子: 二十四世)

達海

자(字)는 득원(得遠)이고, 호(號)는 송정(松亭)이다. 명종(明宗) 신축(辛丑)년에 생(生)하다. 선조(宣祖) 계유(癸酉) 생원(生員)이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갑자(甲子)년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84살이었다. 묘(墓)는 공주(公州) 우정동(牛井洞) 단평(丹坪)이며,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사람들이 공(公)을 민자건(閔子騫)에 비유하였다. (閔子騫은 孔子의 弟子로 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이며, 효성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효성(孝誠)으로 인해 사림(士林)에서 글을 올린 일이 있다. 이 일은 공산읍지(公山邑誌: 公山은 지금의 公州)에 실려 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서울에서 공주(公州)로 떠나오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두 능(陵)의 수치(羞恥)가 씻기지 않았는데도 조정(朝廷)에 서는 것이 어찌 열사(烈士)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 배알(拜謁)하러 갔을 때, 중국인들이 그의 문장(文章)을 만당(晩唐)의 시(詩)에 비할만 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雷峰公의 舊譜序文에도 언급된 사실이다) 기아(箕雅)에 실려있다.

 

 

 

  

二十四世

永深(영심)

 

永同縣監

 

 

二十四世 (經歷公派, 別提公의 子 )

達海

자(字)는 득원(得遠)이고, 호(號)는 송정(松亭)이다. 명종(明宗) 신축(辛丑)년에 생(生)하다. 선조(宣祖) 계유(癸酉) 생원(生員)이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갑자(甲子)년에 졸(卒)하니, 향년(享年) 84살이었다. 묘(墓)는 공주(公州) 우정동(牛井洞) 단평(丹坪)이며,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의 성품(性品)은 지극히 효성스러워, 사람들이 공(公)을 민자건(閔子騫)에 비유하였다. (閔子騫은 孔子의 弟子로 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이며, 효성으로 유명하였다) 그의 효성(孝誠)으로 인해 사림(士林)에서 글을 올린 일이 있다. 이 일은 공산읍지(公山邑誌: 公山은 지금의 公州)에 실려 있다. 임진란(壬辰亂) 후에 서울에서 공주(公州)로 떠나오며 탄식하여 이르기를, "두 능(陵)의 수치(羞恥)가 씻기지 않았는데도 조정(朝廷)에 서는 것이 어찌 열사(烈士)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은거(隱居)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으로 중국(中國) 조정(朝廷)에 배알(拜謁)하러 갔을 때, 중국인들이 그의 문장(文章)을 만당(晩唐)의 시(詩)에 비할만 하다고 매우 칭찬하였다. (雷峰公의 舊譜序文에도 언급된 사실이다) 기아(箕雅)에 실려있다.


 

 

二十五世

魚躍(어약)

 

進士軍資縣判官

贈吏曺參議

  

 

二十五世 (經歷公派, 松亭公의 子 )

鳳輝

자(字)는 덕이(德而)이고, 호(號)는 부촌(浮村)이다. 명종(明宗) 갑자(甲子) 생(生)이다. 선조(宣祖) 병오(丙午) 진사(進士)이고, 공릉(恭陵) 참봉(參奉)과 왕자(王子) 사부(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仁祖) 병자(丙子)년에 졸(卒)하였으니, 향년(享年) 73살이었다. 묘(墓)는 위와 같고, 좌향(坐向)은 임좌(壬坐)이다. 공(公)은 일찍이 우계(牛溪) 성(成) 선생(先生)을 섬겨, 학문(學問)이 순정(淳正)하고, 효행(孝行)이 순독(淳篤)하였으니, 진사(進士) 임만형(林晩亨) 등 백여인이 함께 소(疎)를 올려 임금께 아뢰었다. 초로계(草盧季)에 실려 있다. (이하, 원문에 誤字가 있는 듯하다) 공(公)은 다만 문고(文稿)를 태(泰)하고, 감사(監司) 죽서(竹西) 이민유(李敏迪) 공(公)이 글을 썼다. 공산읍지(公山邑誌)에 나온다.

 

 

二十五世(毅齋公諱湧奇第二孫少尹公諱浩長孫德山公諱浚派,德山公의玄孫)

德海

 

字受吾,號雷峰῁宣祖癸未生῁受業李體素春英῁丙子生員,甲子文科,歷春坊,至 掌令῁丙子亂爲忠淸左道召募官,引兵糧勤王,聞垮成,退歸不仕῁仁祖辛巳八月十三 日卒,享年五十九῁以振武從勳贈都承旨῁文學氣節爲名勝所重,爲言官屢批稟麟῁有 文集,行于世῁墓公州今大德郡炭洞面元松林右麓艮坐῁宋尤庵時烈撰碣文,宋同春浚 吉書,李西谷正英篆῁

配贈淑夫人坡平尹氏῁父贈參判直方,祖生員祥雲,曾祖僉樞枰大司憲慱五世孫,外祖河 東鄭好智῁己丑生丙寅卒,育二男四女῁墓捽右῁

配淑夫人星山李氏῁父埦,祖應進,曾祖讓安成公堅基后,外祖郡守平山申茂῁庚戌生癸 亥卒῁育一男一女῁墓捽左῁

字는 수오, 호는 뇌봉. 인조 계미년에 나셨다. 체소 이춘영 선생께 수업하였다. 병자 생원, 갑자 문과에 급제. 벼슬은 춘방을 거쳐 장령에 이르다. 병자호란 때에 충청좌도소모관이 되어 병량(兵糧)을 모으고 근왕하였다.(勤王: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다). 화친이 성립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인조 신사년 8월 13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59세이다. 진무종훈으로써 도승지에 추증하다. 문학과 기절(氣節)이 매우 뛰어났으며, 언관(言官)이 되어서는 함인을[稟鱗: 무엇을 지칭하는지 제가 모르겠지만, 아래의 글을 참조하시기 바람) 여러번 비판하였다. 문집이 있으며 세상에 간행되었다. 묘는 공주로 지금의 대덕군 탄동면 원송림 오른편 기슭에 있고 좌향은 간(艮)방향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묘문을 짓고, 동춘 송준길 선생이 글을 쓰고, 서곡 이정영 선생이 전서(篆書)를 하다.

配는 숙부인 추증 파평 윤씨. 父는 참판 추증 이름은 직방, 祖는 생원으로 이름은 상운, 曾祖는 첨추 벼슬의 이름은 평(枰)으로 대사헌 민(慱)의 5세손이다. 外祖는 하동 정씨 이름은 호지. 尹 부인은 기축년에 나서 병인년에 졸하다. 2남 4녀를 기르셨고, 묘는 오른편에 합장하다.

配는 숙부인 성산 이씨. 父는 이름은 구(埦)이고, 曾祖는 양안공 성견기의 후손이다. 外祖는 군수로 평산 신씨 이름은 무(茂)이다. 李 부인은 경술년에 나서 계해년에 졸하다. 1女를 기르셨다. 묘는 공의 왼편에 합장.

#. 1583(선조 16)∼1641(인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아버지는 생원(生員) 경청(景淸)이며,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수(璲)의 딸이다. 이춘영(李春英)의 문인이다. 광해군 때 생원으로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 유생들이 이에 가담하는 것으로써 벼슬을 얻으려 하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조반정후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저작(著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으로 있다가 휴가를 얻어 향리에 머물고 있던 중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를 전주로 배위(陪衛)하며 《분조일기, 分朝日記: 분조는 국가위기시 왕조를 둘로 나눠 그 계통을 유지하려는 것》 4권을 기록해 올렸다. 뒤에 전적·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예조와 병조의 좌랑, 용강현령, 예조와 병조의 정랑을 역임하고 사헌부정언으로 있을 때인 1632년 사친추숭(私親追崇: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그의 아버지(私親)를 왕으로 추대(追崇)하려는 것)을 반대한 대사헌 박동헌(朴東憲), 집의 권도(權濤) 등이 화를 당하자 간언을 임무로 하는 대간을 벌함은 잘못이라 하여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혀 구원함)하다가 왕의 미움을 샀다. 그뒤 병조정랑·춘추관기주관·사예·장령·영해부사를 거쳐 1632년 정언(正言)에 거용되어 상경하던 도중 박서(朴?)의 추천으로 충청좌도소모관이 되어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어 모병(募兵)과 모량(募糧)에 힘쓰고 이듬해 의병을 일으켜 항쟁하려 하였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以上, 仁祖實錄, 國朝榜目, 國朝人物考)

 

 

二十五世(毅齋公諱湧奇第二孫少尹公諱浩長孫德山公諱浚派,德山公의玄孫)

汝海

字受之῁宣祖辛卯生῁行寧邊通判,龍川及鐵山府使῁仁祖丙子扈駕,南漢十二月二十 九日殉節῁贈兵曹參判,翌年丁丑返葬于淸州先幐僉樞公墓左壬坐῁公志氣雄遠,有將 帥之材,屢彠邊邑有奇功῁自上給復錄用,其外孫尤庵宋文正公撰墓文,肅宗朝旌閭, 英祖丙子及純祖丙子Ҷ高宗丙子俱遣官賜祭,享淸州儉岩祠及光州秉天祠῁事載丙丁史 及尊周錄῁

配贈貞夫人高靈朴氏῁父察訪循性,祖正郞世豪,曾祖副提學處綸῁墓捽῁

字는 수지. 선조 신묘년에 나셨다. 영변통판, 용천·철산부사를 지냈다. 인조 병자년에(병자호란시) 임금의 수레를 호종(扈從: 호위)하였으며 남한산성에서 12월 29일 순절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그 다음해 정축년에 청주에 있는 선영(先塋=先幐)으로 이장하여 첨추공묘의 왼편 임(壬)방향에 모셨다. 공의 지기(志氣)는 웅원하며 또한 장수의 재목이 있었다. 변방에 임하면서 여러번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병자호란시 순절한 다음] 주상(主上)으로부터 급복(給復: 충신, 효자 등에게 부역을 면제해 주던 일)과 등용(쓰임)을 받았다. 公의 外孫되는 우암 송 문정公(송시열)이 묘문을 찬(撰)하였다. 숙종조에는 정려하였다.(旌閭: 충신, 효자 등을 표창하기 위해 마을에 旌門을 세움). 영조 병자년, 순조 병자년, 그리고 고종 병자년에 각각 관리들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다. 청주 검암사(儉岩祠)와 광주 병천사(秉天祠)에 배향하다. 이 일은 병정사와 존주록에 실려 있다.

配는 정부인 추증 고령 박씨. 父는 찰방 벼슬의 이름은 순성이고 祖는 정랑 벼슬의 이름은 세호, 曾祖는 부제학 벼슬의 이름은 처륜이다. 묘는 합장.


#. 1591(선조 24)∼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 무과에 급제하여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영변통판으로 300여 군사를 이끌고 운산의 적을 기습, 패주시켰다. 이 전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라 용천부사가 되었으나 모함하는 자의 참소로 의주에 충군(充軍)되었다. 배소에 있을 때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의 변란에 백의종군하여 큰 공을 세우고 장연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뒤 철산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체찰사 김류(金?)의 비장(裨將)으로서 지략을 발휘하였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적의 포위 속에 있을 때 김류에게 출전을 간청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고 어영포수(御營砲手) 200여명을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패보를 접한 인조는 매우 슬퍼하고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추증하고 전사자를 수습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以上,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 충북 남일면 은행리에 장군의 旌閭閣(정려각)이 있다.

 

 

 

二十五世(上元帥公諱龍壽玄孫學生公諱自浩長子敎授公諱承漢派)

天錫

字大受῁號壺山῁光海庚申生῁師事尤庵宋先生῁戊子進士,丙寅文科,承旨῁肅宗 己卯十二月十八日卒,享年八十二῁文學忠孝著名,事載國朝寶鑑῁純宗朝採詢忠孝學 行之蹟,特贈資憲Ҷ諡章憲,大提學金鶴鎭撰諡狀῁墓上同有碣῁

配貞夫人杆城李氏῁父進士善承,祖進士亨元,曾祖左承旨後,外祖進士淸州金得洛῁壬 戌生丁丑九月二十一日卒,墓同原有碣῁

配贈貞夫人靑海李氏῁父嗣元῁忌辰六月一日῁墓漁郞面武溪洞鞍馬峴卯坐,有表石῁

字는 대수, 호는 호산. 광해군 경신년에 나셨다. 우암 송 선생을 사사(師事)하였다. 무자 진사, 병인 문과에 급제. 벼슬은 승지. 숙종 기묘년 12월18일에 졸하였으니 향년 82세이다. 문학과 충효가 저명하여 국조보감에 이 일이 실려 있다. 순종조에 충효와 학행의 사적을 채순(採詢; 묻고 채집)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에 특증(特贈)하고, 장헌(章憲)의 시호(諡號)를 내리다. 대제학 김학진이 시상(諡狀: 시호의 내력)을 찬(撰)하였다. 묘는 父의 묘와 같은 곳이며 묘비가 있다.

配는 정부인 간성 이씨. 父는 진사(進士)로 이름은 선승, 祖는 진사로 이름은 형원, 증조는 좌승지로 이름은 인, 외조는 진사로 청주 김씨 이름은 득락이다. [配는] 임술년에 나서 정축 9월 21일에 졸하였다. 묘는 동원.

配는 정부인 청주 이씨. 父는 이름이 사원. [配의] 기신(忌辰, 忌日)은 6월 1일. 묘는 어랑면 무계동 안마현이고, 좌향은 卯방향. 표석이 있다.

 


二十六世

世倫(세륜)

준源殿參奉

贈戶曹判書淸與君

 

 22세 한생으로부터 26세 헤륜에 이르기 까지 족보상에 상세가 기록되어 있지 않음을 봐서 그 시기에 별로 빛을 내지 못한듯 싶다.

 

 

毅齋公諱湧奇長孫直長公諱開長孫參議公允源第三子諱漢生第五世孫, 二十七世)

二十七世  宣祖癸巳生 (AD 1593-1638)

 繼최

 

 字彦淑,號豹谷. 宣祖癸巳生 仁祖丁丑卒(1593-1637)

仁祖甲子῁  義兵平适亂,策振武功臣῁ 丙寅出守 南海῁丁卯亂又立功,除義州判官,陞瑞興府使῁丙子亂,上疏自願,赴敵邀擊於瑞興 斬獲甚衆,旣而爲敵所襲,殉節於新溪鼠目村,卽仁祖丁丑正月四日也,享年四十五 事῁贈漢城判尹,封忠城君῁聞遣官致祭῁事見(현)尊周錄῁高宗辛巳命旌閭῁享光州 秉天祠῁事載勳府籍及文獻誌῁墓府院洞車子峰戌坐῁孫壻李?撰行狀,崇禎後六癸酉 改竪墓表,宜寧南奎熙撰,驪興閔丙承書,海平尹用求書前面῁有實紀一卷῁

配貞夫人礪山宋氏῁父仁慶῁生五子三女῁墓府院洞大松里Ҷ艮坐῁

配貞夫人全州李氏,父成宗大王玄孫光原正琥,祖義信副守備,曾祖伊川君壽,外祖部將 柳宜南῁生二子῁墓與公衣履之藏在於京畿道Ҷ平澤郡Ҷ振威鄕校後麓Ҷ城隍峙Ҷ酉坐合 磡῁

○仁祖朝命官禮葬,賜牌山地及田宅奴婢馬匹,有神道碑῁

公以适亂家族離散,故平亂後獨居,而或云宋夫人死於亂中,故甚恨之῁上憫其獨居, 勸之以宗室女娶之,公不得已再娶于光原正琥女而居之῁其後宋夫人與諸子全歸,故上 告于朝廷,則上曰,{旣知宋夫人死而再娶,則李夫人爲嫡室而宋夫人爲後室,可也}, 故其後修譜時以李夫人爲嫡室,故後孫常以言爭,故今己巳修譜時後孫十一世孫相和Ҷ 相權Ҷ十二世孫球夏Ҷ十三世孫在均等與夫餘門中合議畢以宋夫人孫爲嫡῁以此詳知焉῁ 歲祭日每陰十月八日奉行῁


字는 언숙, 호는 표곡. 선조 계사년에 나셨다. 인조 갑자년에 의병을 규합하여(屟는 糾의 誤字)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3等)에 책록되다. 병인년에는 남해에 나아가 지켰다. 정묘재란시에 다시 공을 세워 의주 판관에 제수되고 서흥 부사로 승진하였다. 병자호란시에 상소(上疏)하여 적진에 나아가기를 자원하였다. 서흥에서 적을 맞아 싸워 적의 목을 벤 것이 아주 많았으나 이윽고 적에게 포위되어 신계 서목촌에서 순절하였으니, 바로 이때가 인조(仁祖) 정축년 정월 4일이며, 향년 45세의 일이다. 한성 판윤에 추증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졌으며 왕께서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 일은 존주록에 나와 있다. 고종 신사년에는 旌閭(旌門을 마을 입구에 세움)하였고, 광주 병천사(秉天祠)에 배향하였다. 이 일은 훈부적과 문헌지에 실려 있다. 묘는 부원동 차자봉에 있으며, 좌향은 술(戌) 방향이다. 公의 손녀사위 李?가 행장을 찬(撰)하였고, 숭정(:중국의 연호)후 6계유년에 묘표(墓表)를 다시 세워, 의령 남씨 규희가 찬(撰)하고, 여흥 민씨 병승이 글을 쓰고 해평 윤씨 용구가 전면에 글을 썼다. 실기(實紀) 한 권이 있다.

配는 정부인 추증, 여산 송씨. 父는 이름이 인경. [송 부인은] 아들 다섯과 딸 셋을 나으셨다. 묘는 부원동 대송리이며 묘향은 간좌(艮坐)이다.

配는 정부인 전주 이씨, 父는 성종대왕의 현손 광원정호(琥)이고, 祖는 신의부 이름은 수비이고, 증조는 이천군(伊川君) 이름은 수(壽)이고, 외조는 부장벼슬의 이름은 유의남이다. [이 부인은] 두 아들을 나으셨다. 묘는 公의 옷과 신발의 유장품과 함께 경기도 평택군 진무향교 뒷 기슭 성황치에 함께 묻었다.

인조(仁祖)조에 관리들에게 명하여 公을 예장(禮葬)하고, 산지(山地), 전택, 노비, 마필 등을 사패하였다.(賜牌: 왕족이나 공신 등에게 토지나 노비 등을 하사할 때 그 소유에 관한 문서를 주는 것, 또는 그 문서를 말함)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公은 이괄의 난으로 가족이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난을 평정한 후에는 홀로 거처하게 되었는데, 혹자들은 송 부인이 난중에 죽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하자 매우 한탄하고 있었다. 주상(主上)이 그의 홀로 지냄을 불쌍히 여겨 그를 권면코자 종실의 딸로 그를 장가들게 하였고, 公은 부득이 광원정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같이 살게 되었다. 그후, 송 부인이 모든 자식들을 데리고 모두 집으로 돌아오자 조정에 이 일을 알리니, 주상께서 이르시길, "이미 송 부인이 죽은 줄 알고 다시 장가를 들은 것이니 이 부인이 적실이요, 송 부인은 후실이 됨이 옳도다"하였다. 그래서 그후 수보(修譜: 족보를 새로 만듦)시에 이 부인을 적실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후손들이 항상 이를 가지고서 언쟁을 벌이는 까닭에 지금 기사년 수보시에 公의 후손, 11세손 상화, 상권 12세손 구하, 13세손 재균 등이 부여 문중과 송 부인을 적실로 할 것을 합의를 끝내니, 이상의 사실을 상지(詳知)하라. 세제일은 매년 음력 10월 18일에 봉행한다.

#. 조선 중기의 충신(忠臣). 1623년(인조 1) 관서행영(關西行營)의 도원수 장만(張晩)에게 의병 800명을 이끌고 가서 그 휘하에서 서로소모별장(西路召募別將)이 되었다. 이듬해 부원수 이괄(李适)이 영변에서 반란을 모의하고 그의 친구 강적(姜適)을 보내어 난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강적의 목을 벤 다음 부하를 거느리고 서울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난이 일어나 왕은 남행(南幸)한 뒤였다. 그는 군사를 사현(沙峴)에 주둔시켰다가 정충신(鄭忠信)·남이흥(南以興)·이수일(李守一) 등과 더불어 난군을 맞아 싸워서 적을 섬멸시켰다. 이 전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3등이 되고 충성군(忠城君)에 봉해졌다. 뒤에 서흥부사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1636년 김자점(金自點)이 원수가 되고 그 휘하의 소모장(召募將)이 되었는데,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서흥검수참(劍水站)에서 맞아 싸워 수백명의 적을 베고 용전하였으나 말에서 떨어져 팔뚝이 부러졌으므로 더 싸울 수가 없었다. 부하군사를 원수에게 부속시키고 편비(?裨) 수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달리다가 신계(新溪)에서 적에게 포위되자 탈출할 수 없음을 깨닫고 칼을 빼어 자진하였다. 뒤에 한성부판윤에 추증되었다. (以上, 仁祖實錄, 鼓山集)

#.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 97의 1에 장군의 神道碑(신도비)가 있다.

#.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 97의 1에 장군의 忠臣門(충신문)이 있다.

#. 충남 부여군 초촌면 봉곡리에 장군의 旌閭閣(정려각)이 있다.

#. 충남 금산군 제원면 동곡리에 장군의 忠義閣(충의각)이 있다.

#. 여담입니다만, 제가 公의 孫子들을 헤아려 보니 무려 61명이나 되더군요. 忠城君派의 인구 수가 충주 지씨 중에서는 제일 많고, 세대수도 일부 빠른 경우 무려 46世에까지 이르고 있 습니다.

 

二十八 世 仁 祖任申生 -肅宗乙卯卒 (AD 1632-1699)

鏡明(경명) 계최의 7째 아들, 配 安人茂州金氏

 

                           1. 水漣  2. 水滴,  3. 水瀾.  4. 水鏡  5. 水賢 6. 鏡澄

  忠佐위副司正 (정7품)

 

 

二十九 世 孝宗甲午生, 肅宗乙酉卒 (AD 1654-1705)

一咸(일함) 경명의 둘째 아들이요, 配 恭人光山金氏   

          

                       첫째는 一彦 (일언, 1648-1719), 通德郞(정5품)

                   

通德郞(정5품)

 

  

三十世 肅宗己卯生 英祖任午卒(AD 1699-1762)

必浩(필호) 日咸의셋째 아들, 配 安東權氏

 

                           첫째 必河, 둘째 必洙 肅宗丙子生 ( AD1696-1729)

                           필호의 큰아버지, 一彦(일언)의 둘째 必謹(필호의 4촌)은 通政大夫(정3품)

     * 필호 할아버지는 벼슬을 한 흔적이 족보에 없고, 그 형님 필근 할아버지가

       통정대부를 지니 셨다.

 

三十一世  肅宗 乙卯生  甲辰卒 (AD 1735-1784)

隣海(인해)   묘는, 永川郡 德山嚴酉坐, 配 坡平尹氏

 

   28세 鏡明 할아버지의  31세의 자손들 중,

   (1) 29세 일언의 손자, 30세 필근의 둘째 아들 成雲(성운)  禮曺參議(정3품)

   (2) 29세 일함의 손자, 30세 필수의 아들 應海(응해) 嘉善大夫(종2품)

 

 

三十一世 (毅齋公의 14代孫, 經歷公派)

錫永 (AD 1855-1934)

字公允,號松村῁哲宗乙卯(AD 1855) 生῁癸未文科,正言,觀察使,左承旨῁甲戌(AD 1934)十二月二十 六日卒,享年八十῁墓忘憂里家族墓地῁公博於文而有啓蒙之績,精於醫而有濟衆之 功῁有文稿῁

配淑夫人驪興陳氏῁父錫圭,祖序儒,曾祖起秀,外祖全州李仁明῁忌辰七月六日῁有一 男一女῁

配淑夫人金海金氏῁父議官顯九,祖都正萬植,曾祖濟根,外祖淸州韓良烈῁

字는 공윤, 號는 송촌, 철종 을묘년에 나셨다. 계미 문과 급제. 벼슬은 정언, 관찰사, 좌승지에 이르다. 갑술 12월 26일에 졸하니 향년 80이다. 묘는 망우리 가족 묘지이다. 公은 文에 박식하여 계몽의 치적이 있으며, 의술에도 정통하여 대중을 구제한 공이 있다. 문집이 있다.

配는 숙부인 여흥 진씨. 父는 석규, 祖는 서유, 증조는 기수, 외조는 전주 이씨 이름은 인명이다. 기일은 7월 6일이다. 일남 일녀가 있다.

配는 숙부인 김해 김씨. 父는 의관 벼슬의 이름은 현구, 祖는 도정 벼슬의 이름은 만식, 증조는 제근, 외조는 청주 한씨 양열이다.

#. 서울대학 병원내에 선생의 동상이 있다.

동상(銅像)과 더불어 적힌 글:

松村 池錫永 先生은 朝鮮王朝末에 처음으로 種痘法을 보급한 近代 醫學의 開拓者이며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最初로 設立된 近代醫學敎育機關인 官立醫學校 初代 校長으로 이땅에 醫學敎育의 기틀을 마련한 先驅者로서 이제 後學들은 先生의 높은 業績을 기리고 敎育과 社會奉仕에 바친 先生의 崇高한 理念을 길이 傳하기 위하여 뜻있는 이들의 精誠을 모아 이 銅像을 建立한다.

#. 先生은 근대 의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국문 연구에도 공헌한 바가 크다. 1905년에 신정국문(新訂國文) 6개조를 왕께 상소하여 공포케 하고, 학부(學部) 안에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를 설치케 하였다.


 

 

三十二世 肅宗乙酉生, 英祖丁酉八月五日卒( AD 1729 - 1777)

啓昌(계창)

 

通政大夫(정3품),  配 淸州韓氏

  묘는   慶州郡 杞溪面禾垈洞 甲座에 모셨다가,

  현재 우리 직계가문의 선산인 迎日郡 西面 中丹里로 이전함

 

      *  같은 학력의 현제중에,

         (1) 30세 必謹의 손자, 31세 成雲의 아들 海元이 訓蒙敎官(정3품)을 지녔다.

               해원의 아들(32세) 建休(33세)는 壯陵參奉 贈 戶曺參議         

 

(2) 30세 必謹의 손자, 31세 成玉의 아들 海達이 通政大夫(정3품)을 지님

 

 

三十二世 (毅齋公의 15代孫, 經歷公派)

靑天

字大亨,一名錫禹,號白山῁一八八八年甲子一月二十五日生,一九五七年丁酉一月十 日卒῁墓道峰區水踰洞光復公園墓地῁滿洲通化縣新興武官學校敎官,高麗革命軍官學 校校長,正義府軍事要員兼總司令官,大韓獨立軍總司令官으로雙城戰鬪및大旬子嶺戰 鬪에勝利,大韓民國上海臨時政府軍事部長,韓國光復軍總司令官,制憲國會議員,大 同靑年團長,初代無任所長官,建國功勞勳章복장,中央宗親會初代會長歷任῁

配坡平尹氏῁父基喜,墓合葬῁

 

字는 대형, 또다른 이름은 석우, 호는 백산. 1888년 갑자 1월 25일에 나서 1957년 정유 1월 10일에 졸하다. 묘는 도봉구 수유동 광복 공원묘지. 만주 통화현 신흥무관학교 교관, 고려 혁명군관학교 교장, 정의부 군사요원 겸 총사령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쌍성전투 및 대순자령 전투에 승리,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군사부장,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제헌 국회의원, 대동청년단장, 초대 무임소장관, 건국공로훈장 복장, 중앙 종친회 초대 회장 역임. 配는 파평 윤씨. 父는 기희, 묘는 합장.

 

#. 천안 독립기념관 정문에 장군의 어록비가 있다. 어록비 내용: 大旬子嶺의 攻擊은 二千萬大韓人民을 爲하여 원수를 갚는 것이다. 총알 한 개 한 개가 우리 조상의 수천 수만의 英魂이 保佑하여주는 피의 使者이니 諸君은 檀君의 아들로 굳세게 용감히 모든 것을 희생하고 萬代 자손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라.

 


 

三十三世   英祖丙辰生 高宗甲茂 九月十一日卒(AD 1796-1874)

基弼(기필)  配 密陽朴氏

僉知中福府事. 묘는 선산(선산이 두곳에 있음), 영일군서면사가리

 

           (1)  基載(33세)-成涵의 손자요, 海貞의 아들.

               肅宗丁未生  純祖任申十二月八日卒(1727-1812)

           (2) 기재의 아들 德麟이 (34세) 禮曺參議를 지님

           

*  기필 할아버지 이후부터 족보에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三十四世 英祖甲午生  正祖戊午八月二十五日卒 (AD 1774-1798)

命得(득명) 配 密陽朴氏

                    묘 서면사가리 선영

 

 

    三十五世 

 宅潤(35) -達源(36)-完鉉(37)-坤求(38)                           

                                           鈺求(38)-仁根(39)-正煥(40)                     

                                           錘求(38)-相根(39)-植煥(40)

                                                         經根(39)-徹煥(40)

                                                                       輝煥(40)

                                                         孝根(39)-正煥(40)

 

   三十五世

 宅久(35)-菊源(36)-永鉉(37)-世求(38)-旭根(39)庚申(AD 1920.5.9)

                                                        順哲(39)(女)癸亥(AD 1923)

                                                        貞根(39)    戊辰(AD 1928)

                                       (1명 正德 )  景根(39)-聖煥(40)

                                                                    -吉煥(40)-------善培(41)

                                                                                               俊培(41)

                                                        茂根(39)

                                                        達根(39)

 

三十五世 純祖任戊生 哲宗乙未四月二十八日卒(AD 1802-1859)

宅久(택구)

                        묘 西面中丹里 선산,  配密陽朴氏

              

 

 

三十六世  純祖丁亥生 高宗己丑三月六日卒 (AD1827-1889)

菊源(국원)       묘 영천 고천면 상수동, 配陽川許氏


                                                               

 

 三十七世 高宗任申五月二十三日生 (AD 1872-1936

永鉉 (영현) (일명 永圭)  )

  配 月城金氏 父 炳重,   高宗己巳八月三十日生    (AD 1869-1942)

 

   할아버지 1936년에 별세하시었으나, 아버지가 안강에서 목회하실때  일제시에는 선산에 장례를 치루지 못하여 묘는 경북 안강교회 김해천(외가와 인척) 장로님 부인 산소 곁에 안치하였다가. 백호가 미국이민온 관계로 1985년 추석날, 선산 西面 中丹里에 이장하였다.

 古 池永圭之 墓 라는 비석이 서 있다.

   

   할머니의 산소는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 동당리 공동묘에 모셨으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을 듯 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38선이 가로막힌 탓이다.

   *  족보에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자가 기록되지 않을 것을 봐서, 이 족보는 할아버지 생존시에 편찬된 것임을 알수 있다.  백호의 3살때 돌아가신 것으로 구전되어 있다.

 

   백호의 할아버지 영현은 삼대독자로서, 29세에 백호의 부친을 득하셨다.   할아버지는 한학자요 한의였다.

   대대로 불교인 우리 가문이, 아버지(세구)가 예수님을 영접하자, 할아버지도 상투를 밀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경북 영일군 연일면 생지동에 소재한 연일교회를 창설하고 장로가 되셨다.

  

 

三十八世  光武 庚子 八月二十五日生  光復 丁亥 三月二十七日卒 (AD1900-1947)

世求 (일명 世演), 장로교 목사.  묘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태산리, 태산교회 조장로 선산.

 

      配 月城金氏 父浩東, 어머니 실명은 金玉今 辛丑生 戊寅卒(AD 1901-1938), 묘 함경북도

                                          配 黃愛希 (AD 1913-1995,3월3일)

                                          子  茂根 壬午四月二十四日生(1942- 2001,6.20)

                                                무근은 사후 유산 4천만원을 중국 신향에 복음센터건립에 기증했고, 시신은 순천향병원에 기증하여 후학에 이바지 하기로 했다.

 

                                          子  達根 癸未十月十三日生 (1943-1985, 2.19)

                                               달근이는, 숭대사학과 2학년 재학중 419혁명 대열에 참가,  부상을 입고, 월남전에 참전, 혁혁한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불행이도 월남전의 심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1985년 2월19일 42세의 일기로 별세하고, 현제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백호가 어렸을때,  큰 형 욱근의 이름이 족보에 기록된 것을 봤다. 이로써

  그 파보가 1920년 대 이후에 편찬된 것을 알수 있다.

 

 

三十九世  癸酉生 四月七日生 (AD 1933-   )

 

景根(일명 正德),    기독교 목사.

 

 配 原州邊氏 父 鳳珏 丁丑 正月五日生(AD 1937- )

 

 四十世

 

 聖煥(일명 聖旭)  己亥 十二月十二日生( AD 1959-)

 

 吉煥(일명 聖吉)  辛丑 五月六日生 (AD 1961-)

     配 原州邊氏 父 재억, 辛丑十一月十三日生 (AD 1961-)

     子  善培 俊培

 聖美(여) 癸卯 八月十七日生 (AD 1963- )

    配, 태  홍   庚子 一月十九日生(AD 1960- )

         子,  태지원 戊辰 十一月四日生 (AD 1988-)    

               태지훈 庚午 七月十八日生 (AD 1990-)

               태지미 辛未 七月十二日生 (AD 1991-)

 

 四十一世

 

 善培  丁卯 三月三日生         (AD 1987- )

 俊倍  庚午 三月二十七日生   (AD 1990-)

 

 

 

          ###. 충북 충주시 종민동에 충주 지씨 시조의 추모비와 6세조의 유적비를 세웠다.

 

###. 전남 광주에 秉天祠院(병천사원)을 충성군파의 후손, 조선조 참봉, 중추원 참의관인 池應鉉 公이 건립하시고 충신들의 영정을 모셨다.

 

###. 경북 안동군 와룡면 가구동 송정리에 友松亭을 세워 조선 세조 충청 절제사공 諱 逢源공을 추모하다. 그리고 매년 享祝한다.

 

###. 경남 의창군 내서면 신감리 1230번지에 義忠祠를 세워 고려조 및 조선조 공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매년 祭享을 奉行한다.

 

이상 대략을 적었으나, 미비된 것은 후세의 자손들이 보충하기를 바란다.

우리 가문이 이렇게 뻣대있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이조에서 고고한 선비의 가문으로 내려왔으니, 이후 후손들이 열조의 얼을 내려받아 더욱 가문을 빛내어 가기를 이에 다짐하노라.